*유홍준 '완당 평전'최고의 서예가, 시와 문장의 대가, 금석학과 고증학의 최고봉, 문인화의 거두…”
일세를 풍미한 천재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는 여러 사람이 도달하기 힘든 경지를 혼자 몸으로 성취했다.
어느 한 분야 모자람없이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종합 예술가이자 학자.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타계한 지 150년이 다되도록 변변한 전기 하나 없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兪弘濬ㆍ53ㆍ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씨가 그의 삶과 학문, 예술을 종합적으로 복원한 전기물 ‘완당평전’(학고재 발행)을 두 권으로 냈다.
1998년부터 6회에 걸쳐 계간 ‘역사비평’에연재한 글이 중심이 됐는데 완당 관련 자료와 해제는 3권으로 묶어 따로 펴낼 계획이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 명문가인 경주 김씨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순조를 수렴청정한 정순왕후가 11촌 대고모이고 고조할아버지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까지 올랐다.
증조할아버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둘째 사위였고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여섯살때 대문에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보고 박제가(朴齊家ㆍ1750~1805)가“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라고 하여 사제의인연을 맺었다.
책은 이제 그가 스물 셋에 부친과 함께 중국 연경(베이징)에 가서 평생의 스승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운대(芸臺) 완원(阮元)을 만나고 귀국 후 추사(秋史)보다, 완원을 존경한다는 뜻의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즐겨쓰게 된 과정, 서른넷의 나이에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 출세 길에 오르고 낯선 중국인으로부터 ‘문안드려 인사올리는그림’을 받을 정도로 인생의 절정을 향해가는 과정을 꼼꼼히 보여준다.
안동 김씨와의 대결에서 패해겨우 목숨을 건진 채 제주에 유배돼서도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 세한도(歲寒圖)를 완성한 놀라운 예술가적 기질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그렇게 탄생한 세한도가1943년 일본인 수집가의 손에서 서화 수집가 손재형(孫在馨)에게 가까스로 넘어온 직후 일본인 수집가의 집이 폭격을 맞게 되는 후일담까지 전한다.
저자는 “70 평생에벼루 10개를 밑창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완당을 ‘산숭해심(山嵩海深) _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으로 표현하면서 책을 마친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처럼 칭송한 완당은 어떤 세상을 추구했을까. 아쉽게도 책은그가 진정 원했던 세상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에 대해 유씨는 “조선의 봉건질서가 한계를 드러내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이 막 시작되려는 바로 그 시기에도 완당이 사회적 문제를 외면한 채 자신의 실존적 문제에 더 천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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