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생활을 마치고 대학으로 들어온 것이 3월이면 1년이 된다. 내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소식에 주위의 친지나 친구들이 많이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최근까지 심심찮게 들려온다.35세의 적지않은 나이, 다른 사람들이 유학을 갔다가 돌아올 나이에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주위에서 걱정이 많았겠지만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자신감 하나만 가지고 유학길을 나섰다.
유학생활은 박찬호의 텍사스 레인저스의 본거지인 달라스에 있는 서든메소디스트대학에서 시작했다. 영어공부가 제대로 안돼 있어 강의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독학한다고 애를 먹었다.
수업시간에 교수의 눈빛을 가능한 한 피하면서 겨우 학점을 따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법대 게시판에서 국제노동법이라는 강좌가 개설됐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동료의 권유로 수강신청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과목의 담당강사는 랜스 캄파라는 변호사였으며, 그의 진지한 눈빛과 열강에 매료되어 다른 수업과는 달리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당시 동료들은 강의시간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벙어리’로 취급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예일대학 동창이었던 그 강사는 강의 중간에 클린턴 부부의 학창시절 사랑이야기도 가끔씩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7년 봄, 석사학위를 마치고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원래는 미국변호사가 되려 했다.
미국에서도 변호사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만 그 당시 한국에 비해 많은 숫자의 변호사가 배출되면서 경쟁이 치열했다.
진로문제를 상의할 교수를 찾고 있던 중에 랜스 변호사가 생각났다. 혹시 그가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걱정하면서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흔쾌히 나를 자기 사무실로 오라면서 환대하였다.
그는 영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공부할 것을 권하면서 추천장을 써 주겠다고 했다. 물론 나는 코먼로(Common Law)의 본고장인 영국에 관한 동경도 있는 터였다.
그의 조언과 추천장 덕분에 영국의 명문대인 맨체스터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교수생활을 하면서도 짧은 만남을 가졌던 외국인 유학생에게 우정어린 친절을 보여줬던 랜스 변호사를 내내 잊을 수 없다.
정형진 경북대 법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