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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우리의 모습, 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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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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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소년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장르를 꼽으라면 단연 뮤직비디오이다.‘영상세대’로 불리는 청소년들은 8~10분의 짧은 시간에 한 편의 영화를 압축한 듯한 줄거리에 음악까지 선사하는 뮤직비디오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뮤직비디오가 인기를 끌면 음반 판매량도 덩달아 늘어난다. 거의 하루 종일 음악만을 틀어대는 케이블 방송 덕에 뮤직비디오 자체 시장도 엄청 커졌다.

업계에 따르면 한 달에도 수십편의 뮤직비디오가 탄생하는데 편당제작비는 1억원을 훨씬 넘는다. 2000년에 나온 조성모의 ‘아시나요’는 한 편에 10억원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요즘 자주 방영되는 ‘명성황후’ 뮤직비디오도 그 중 하나이다.

동명의 KBS-TV 연속극 배역진과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서 명성황후의 간택부터 죽음까지를 다룬 이 뮤직비디오가 TV와 다른 것이 있다면 명성황후를 사랑하는 왕실 호위대장의 존재를 끼워넣은 것.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차용한 듯한 이 등장인물은 소녀 시절 민씨를 알게 되며, 연모하던 이를 지키기 위해 왕실 호위대장으로 들어갔고 나중에는 일본 자객단에게 먼저 목숨을 잃는 것으로 나온다.

종실내 권력다툼에 빠져 국가를 도탄에 빠뜨린 조선 왕조 마지막 왕비를 새 시대의 영웅으로 그려내는 우리 대중문화계의 유행을 새삼 비판하진 않겠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새롭게 놀라게 되는 것은 극단적인 반일감정과 혼재하고 있는 일본 문화에 대한흠모이다.

조선인이 분명한 호위대장은 머리 모양과 복장이 일본인 자객과 거의 똑같다.

그는 윗부분만 뒤로 묶어 긴 머리가 옆으로 술술 날리는, 전통적인 일본 평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걸친 옷이나 발목의 각반 같은 것들도 왜색이 물씬하다.

한편으로는 이 뮤직비디오는 일본도에 쓰러지는 조선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북돋우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극단적 배타주의와 외국문화에 대한 동경이 혼재된 양상은 현대를 배경으로 다루는 뮤직비디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뮤직비디오들의 배경으로는 외국의 아름다운 풍광이 주로 등장하고 거기엔 어김없이 외국인에게 희생되는 한국인이있다.

최근 2년간 인기를 끌었던 몇 편을 꼽아보자. 캐나다에서 촬영된 포지션의 ‘아이러브 유’에서 남자 주인공은 외국인 사채업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동반자살한다.

S.E.S의 ‘유(U)’에서 슈는 카지노 딜러로서 외국인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조성모의 ‘잘가요, 내 사랑’에서 이나영은 백인인 집주인에게 거칠게 쫓겨난다.

이런 뮤직비디오에는 공식이 있다. 우선 짧은 시간 안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줄거리는 만화처럼 단순해지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주인공은 희생된다. 이 때 외국인에게 희생되는 한국인이란 설정은 자극을 극대화한다.

최근 우리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을 통해 미국인들의 혐오스런 민족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방송인 제이 리노가 “(김동성은) 화가 나서 집에 가서 개를 걷어찬 다음, 아예 잡아먹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 그들이 웃은 것은 한국인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리가 분노한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민족주의는 다른 문화권을 헤아리지 못하는 유아기 문화이며 누가 해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죄악이지만 잔혹한 장면을 통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한류(韓流)’의 유행으로 우리나라의 문화는 더 이상 우리나라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좀더 의젓하고 품위있는 사고의 틀을 세계인과 나눌 생각이 없는가.

우리만의 틀에 갇혀서 외국에 대한 터무니 없는 선망과 극단적인 배타주의를 버무려 엮는 문화 장르는 이제 좀 걸러질 때가 됐다.

문화과학부장 서화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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