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2월23일 구한말 일제시대의 친일반민족 행위자 배정자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1951년 서울에서 몰(歿).한때의 명성황후 민씨가 그랬듯, 배정자 역시그 이름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두 여자의 처지는 매우 달랐다.
한 여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힘센 여자로서 권력을휘두르다가 궁궐 안에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됐다. 다른 여자는 아전의 딸로 태어나 일본인들의 앞잡이로서 조국에 대한 복수에 전념했다.
사실 배정자의아버지 배지홍을 처형함으로써 어린 분남(紛南: 배정자의 아명)을 길거리로 내몬 것이 민씨 일파였다.
배정자가 받고 있는미움에는 물론 근거가 있다.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였고, 사다코(貞子)라는 이름도 이토에게서 얻었다.
그녀는 일제의 한국 병탄이전에나 이후에나 일관되게 일본의 밀정으로서 정치공작에 종사했다. 그러나 기자는 그녀의 삶이 밉기보다는 슬프고 황폐하다.
배정자의 81년 삶속에는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과 확인이 힘든 소문ㆍ전설들이 뒤범벅돼 있다.
국권 피탈 이전에는 이토의 앞잡이로, 이후에는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모토지로(明石元二郞)의 앞잡이로 그녀가 종사한 첩보 활동이나 선무공작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확인된다.
그리고 그녀가 세 번 결혼했다는 것과 그녀남편들의 행적도 확인된다. 그러나 배정자의 삶을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더 많은 요소들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이다.
예컨대 이토의 피살 소식을듣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했다는 얘기, 한일합방 소식을 듣자 병석에서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는 얘기 그리고 혼인 생활 바깥의숱한 염문들이 그렇다. 배정자는 1948년 반민특위가 체포한 여섯 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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