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라는 과장된 수식어가 출판계만큼 흔하게 쓰이는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IMF 이후 ‘단군 이래 최대’라는 불황에 시달리던 출판계에서, 요즘은 일부 출판사 영업자들 간에 ‘단군 이래 최대호황’이라는 즐거운 비명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는군요.
밀리언셀러가 잇달아 등장하고, 한번 ‘떴다’ 하면 곧바로 수십만부씩 팔리는 책들을 찍느라 인쇄ㆍ제본소가 24시간 가동해도 주문을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최근 출판계의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가져온 책들을 살펴볼까요. 거기서 출판산업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리 포터’ ‘오페라의 유령’ ‘반지의 제왕’ ‘괭이부리말 아이들’ ‘봉순이 언니’ 등등.
이런 책들의 호황을 놓고 해석은 엇갈립니다. 이제 책은 영화나 TV, 뮤지컬 같은 인접 문화상품의 지원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책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그 한쪽입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역설적으로, 문화자본주의의 꽃인 영상문화는 책이라는 원작의 창의력ㆍ상상력의 도움 없이는 개화할 수없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느 한쪽의 손만을 들어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다른 문화 장르와 달리 책이라는 문화매체만이 가질 수 있는 창의력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소설가 복거일씨가 자신의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원안’으로 한 영화 ‘로스트 메모리즈 2009’의 제작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겠다고 해서 화제가 됐지요.
영화가 원작을 훼손했다는 것이 주이유였습니다.사실 그동안 원작 판권의 문제는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우리 작가들에게는 심각한 딜레마였습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나 TV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거대 영상자본에 대한 그들의 협상력은 얼마 되지 않는 돈에 쉽게 원작을 넘겨줄 수 밖에 없는 허약한 상황입니다.
막상 원작의 내용이 심각하게 변질되고, 원작자명ㆍ작품명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자막처리되어 버린 영상물에서 대중들은 그 작품이 과연 작가의 창의력에서 비롯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위에 든 몇몇 예처럼 뒤늦게 영상물의 바람을 타고 원작이 각광받는 경우는 사실 극히 드물지요.
새삼 이 문제는 모든 문화의 토대가 되는 출판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책이 가진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존중하는 풍토 말입니다. 그 토대가 형성되면 단군 이래 최대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출판산업의 불안정성도 다소는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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