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웅 장점만 지닌 지도자가 나왔으면…"2000년 4월 1일 오후 9시 50분, 브라운관을 통해 갈매기 한 마리가 창공을 가르고 올랐다. 한국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은 ‘태조 왕건’의 시작이었다.
1년 11개월이 흐른 24일, 백제 정복으로 삼국 통일을 완성한 왕건의 환희의찬 표정이 화면을 채우면서 숱한 화제를 던졌던 ‘태조 왕건’은 막을 내린다.
▼태조 왕건의 의미
‘태조 왕건’은 한국 드라마사상 후삼국 통일과 고려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대하 사극. 그 동안 방송사들은 고증의 어려움과 막대한 제작비 등으로 고려 사극을 다루지 못해 조선사만을 다뤄왔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큰 규모로 시작된 ‘태조 왕건’ 은 1년 11개월간 평균 시청률 40%대를 유지하며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까지 텔레비전 앞으로 몰려들게 했다.
“단순히 과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려 건국을 중심으로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화합과 통합이라는 21세기의 시대 정신을 창출하겠다”는 김종선PD의 기획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태조 왕건의 인기 비결, 어제와 오늘의 대화
‘태조 왕건’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영국 역사학자 E.H. 카의 말처럼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과정과 고려 건국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보게하는 묘미를 던져주었다.
종간 등 신하들의 암투 등으로 나라를 망치는 장면에선 대통령의 참모들의 비리를 떠 올릴수 있었고, 철저히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선 후삼국의 정세를 보면서는 현재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일그러진 오늘의 정치권을 떠 올리게 했다. 동시에 인기를 위해서 현재의 정치상황을 드라마에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또한 탤런트들의 개성 강한 연기도 인기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인석은 “호방함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로 과장 연기를 했다”고 했다.
김학철 이계인 이광기 등은 “서인석 선배보다 더 튀어야 시청자의 눈길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사 톤과 액션 연기를 크게 했다”고 했다.
김영철은 “영하 15도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 진행된 야외 촬영에서 입이 얼어 뜨거운 물로 입을 녹이면서 대사를 했다. 말에 떨어져 부상을 입은 경우도 허다하다”고 출연 당시를 회고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세 영웅, 궁예, 견훤, 왕건
19일 CCMM빌딩에서 열린 종영 기념식에서 왕건역의 최수종은 “내일 다시 녹화장에 갈 것 같다. 꿈도 대사로 꿨을 정도다. 왕건은 적도 포용력으로 자기 사람을 만든 덕치를 한 황제였다”고 말했다.
김영철은 “내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었던 작품이었다. 외눈박이 역할을 하면서 시력이 0.2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는 드라마여서 최선을 다했다. 궁예는 폭군으로 알려졌지만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며‘태조왕건’ 종영을 아쉬워했다.
서인석은 “견훤은 호방하고 의리가 있는 영웅이다. 그러기 때문에 단기간에 후백제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다. 끝났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며 웃는다.
세 사람은 “세 영웅의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있다면 백성들은 정말 행복할 것이다”며 입을 모은다.
▼‘태조 왕건’의 산업적 효과
드라마와 관련된 문화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했다. 야외 세트장이 설치된 문경새재 공원과 제천 등은 ‘태조 왕건’ 방송으로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렸다.
이 때문에 지방자치단체마다 세트장 유치 바람을 일으켰다. 경기 부천시는 SBS ‘야인 시대’ 야외세트를 짓고 있고, 충남 금산군은 ‘상도’의 세트를 지어 관광자원화했다.
경북 문경시 문학재 시장은 “ ‘태조 왕건’ 세트 덕분에 문경새재 공원을 찾는 사람이 급증해 1년 11개월 동안 400억원의 관광 수입을 올렸다”고 말했다.
▼문제점도 남겨
‘태조 왕건’은 동시에 문제점도 많이 남겼다. 정통사극이 과연 역사를 창작해도 되느냐 하는 것도 그 중 하나. 전문가들은 신라 경순왕의 비굴한 장면을 비롯해 역사왜곡 장면이 유난히 많았다고 지적한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등장시킨 ‘동남풍’ ‘관심법’ 등은 허구를 지나치게 사실화했다는 사례로 지적됐다.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한 것도 비판을 받았다. 금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자신의 눈알을 뽑아 먹는 장면 까지 여과없이 방영됐다.
이 때문에 사극에서 역사적 사실을 어느 선까지 담아야 할 것인가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숫자로 본 '왕건'
‘태조 왕건’은 1999년 11월 20일첫 촬영에 들어간 이후 종영까지 총 촬영일수만 873일이 걸렸다.
작가 이환경씨는 매회 200자 원고지 100매에 해당하는 대본을 홀로 집필해, 총 2만매를 써냈다. 연인원 40만명이 제작에 참여했고 총제작비는 500억원으로 추산된다.
보통 사극의 제작비가 회당 5,000만원에서 1억 정도임을 감안하면 최고 4배의 기록. 타이틀에 이름을 올리는 연기자만 해도 평균 100명, 카메라 조명 음향 의상 등 스태프도 평균 100명에 이른다.
말도 회당 40필이 출연했다. 드라마 초반 방영된 궁예의 철원성 전투 장면과 후반 백제 몰락의 계기가 된 고창전투 장면에서 동원된 엑스트라가 하루 500명으로, 연기자와 스태프를 포함해 최대 700명이 동시에 촬영장에서 북적댔다. 최다출연자는 견훤 역의 서인석으로 총 195회 출연했다.
AC닐슨미디어의 조사에 따르면 ‘태조왕건’은 24주 연속(2001년1월27일~7월1일) 주간평균시청률 1위를 유지했다.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때는 궁예가 최후를 맞이한 지난해 5월20일 방영분. 60.2%(AC닐슨 집계)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첫사랑’(65.8%) ‘허준’(63.5%)의 기록을 깨드리지는 못했다.
96억원을 들여 제작한 문경, 제천, 안동의 오픈세트에는 총 4만 여 평에 고려왕궁과 백제왕궁 외에도 건물만 136동이 들어서 있다.
해상전투를 위해 제작한 선박은 80톤짜리 1척과 70톤짜리 6척. 오픈세트는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돼, 문경오픈세트는 관광객이 6배 이상 늘어났다.
드라마 촬영 전에는 관광객이 연 50만 명이었으나, 2000년 250만 명을 넘어섰고, 2001년에는 3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증을 통해 고려시대 의상도 3,000점을 제작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왕건이 배출한 스타
‘태조 왕건’은 축이 된 세 영웅, 왕건 궁예 견훤에게 다시 없는 인기를 안겨준 것은 물론 개성적인 연기를 선보인 중견연기자들에게까지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아주었다.
가장 시청자의 주목을 받은 연기자는 궁예 역의 김영철. 독단적이고 광기어리면서도 저력이 느껴지는 카리스마를 발하며 중반까지 ‘태조 왕건’의 인기를 이끌었고, 2000년 KBS연기대상의 대상을 차지했다.
‘태조왕건’이 난공불락처럼 버티고 있던 시청률 1위 자리가 궁예의 죽음 이후에는 ‘여인천하’와 공유해야 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견훤역의 서인석은 어깨와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간 다소 과장스런 연기로 역할을 소화해 지난해 KBS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궁예, 왕건과 차별화했다.
아버지에게 견훤에게 인정받지 못해 고뇌하는 신검역의 이광기는 후반들어 진가를 발휘하며 데뷔 17년 만에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인자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책사들은 역사상 기록에서는 그리 부각되지 못했으나 드라마 안에서의 대결은 만만치 않았다.
궁예의 책사 종간역을 맡은 김갑수는 냉철한 이미지로 책사 역의 전형을 만들어냈고, 종간과 갈등하며 궁예를 파탄으로 몰고간 아지태역의 김인태, 조국 후백제의 흥망성쇠에 따라 비운의 삶을 살았던 최승우역의 전무송은 중견연기자의 저력을 과시했다.
정태우는 출연진중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요절한 천재 책사 최응을 안정감 있게 그려냈다. 험상궂은 인상 뒤로 의리가 넘치던 박술희역의 김학철, 지나친 과장연기로 튀기까지 했던 애술장군역의 이계진, 고집불통의 아자개 역의 김성겸 등 중견연기자들은 코믹한 이미지로의 변신에도 성공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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