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비판적 지지’라는 말은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민통련을 중심으로 한 재야의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당시의 김대중 후보에 대해 취한 입장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김대중씨의 민중지향성이 비록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유력한 후보들 가운데서는 민족자주와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그가 가장 우호적이라는 판단이 비판적 지지론의 근거였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비판적 지지라는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번에는 지지의 대상이 민주당의 노무현 상임고문이다.
비판적 지지론자들의 주장은 민주당의 개혁적예비 후보 가운데 득표력이 가장 큰 노 고문을 중심으로 개혁세력이 단합함으로써 민주정부의 정통성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득표력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실 노 고문은 개혁적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가운데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와 극우세력의 기득권에 맞서 가장 단호한 태도를 견지해 왔으므로, 그를 개혁세력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자연스럽다.
이런 비판적 지지론에 대해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정치권의 반발도 거세다. 이들의 주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드러냈 듯 기성 정치권에서 성장한 노 고문의 민중지향성 역시 그 한계가 뻔하다는 것이다.
지금 비판적 지지론자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민주당의 경선 후보 등록일(22~23일) 이전에 개혁 세력의 후보가 단일화하는 것일 터이다.
일단 예비 주자들이 모두 경선후보 등록을 하고 나면 경선 과정의 원심력 때문에 단일화가 더 힘들어지는 데다, 권역별 경선이 시작되고 난 뒤 사퇴하면 그 때까지 사퇴 후보가 얻었던 표는 모두 무효가 돼 단일화의 효과도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선 후보 등록 일이 고작 하루 남은 지금, 개혁세력이 그 사이에 극적으로 연대에 합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비판적 지지론자들의 마음이 조급할 법도 하다.
그러나 기자는 이 조바심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민주당원을 포함한 국민 경선 참여자들이 노 고문이든, 아니면 김근태 상임고문이나 정동영 상임고문이든 개혁적 인사를 민주당 후보로 선출할 경우, 비판적 지지자들은 편한 마음으로 그 후보를 밀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 개인의 세계관은 집권당의 정책에 짙게 투영되기 마련인데, 민주당의 개혁적 후보들이 예컨대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에 비해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문제에서 훨씬 더 진취적이라는 것은 그들의 지금까지 행적에서 뚜렷하다.
만약에 현재의 여론조사가 가리키듯 이인제 상임고문이 후보로 선출될 경우에도 그것이 비판적 지지론자들의 고민거리가 될 수는 없다.
비판적 지지론자들은 이인제 상임고문이 본선에서 이회창 총재를 누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이긴다고 하더라도 ‘이인제 대통령’과 ‘이회창 대통령’ 사이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판단에 충실해 ‘비판적 지지’라는 굴레를 벗고,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진보정당의 후보를 밀면 그만이다.
민주당의 후보 선출 뒤에 지방선거가 치러지므로, 그들은 지방선거에서부터 진보정당의 후보를 밀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본적 곧 민족민주 운동권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런 선택은 우리사회의 정치지형을 선진국형으로 정상화하는 긴 여정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선진국형이란 물론 건강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주류를 이루고 좌우의 극단파들이 잔류 수준에서 변두리에 포진하는 지형이다.
선진국형의 정상적 정치지형 속에서는 진보정당이 꼭 집권할 필요도 없다.
진보정당은 강력한 야당으로서 입법 활동을 통해서 진보적 가치들을 구현할 수 있고, 또 집권 보수당의 정책을 민중 친화적으로 견인해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비판적 지지자들은 낙관적이어도 좋을 것 같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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