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속으로] 李容翊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속으로] 李容翊

입력
2002.02.20 00:00
0 0

1907년 2월20일 구한말의 정치가 이용익이 연해주(沿海州)에서 작고했다. 향년 53세. 이용익은 함북 명천 출신이다.출신이 한미했던 그가 조선조 말기 정계의 한가운데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 신분질서의 와해라는 시대적 배경 이외에도 고종의 비(妃)인 민씨와의 특별한 관계가 계기가 되었다.

걸음걸이가유달리 빨랐던 이용익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장호원에 피신해 있을 때 민비를 도우며 고종과의 연락을 취해 민씨 일파와 고종의 단단한 신임을얻었다.

함남병마절도사로 발탁된 이용익은 북청 민란을 만나 탐관오리로 탄핵받고 전라도 신안으로 유배되기도 했지만, 이내 풀려나 중앙 정계로 진출해 벼슬이 탁지부 대신에 이르렀다.

그는 친일 세력과 친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의 중앙 정계에서 주로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며 친러파의 우두머리로 활약했다.

그래서 이용익 개인의삶도 친러파와 부침을 함께 했다. 그는 자신이 반대했던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군부대신직을 사퇴하고 우여곡절 끝에 연해주로 망명해그 곳에서 구국운동을 계속하다 병사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반일 노선이 옳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친러 노선이 옳았는지, 적어도 사적이해를 떠나 정정당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국에 대한 이용익의가장 큰 기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에 있을 것이다. 1905년 법률학과 이재학(理財學: 오늘날의 경제학)의 2개 전문과를 둔2년제 학교로 출발한 보성학원은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사립대학으로 발전했다.

이용익이 만년을 보낸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프리모르스키라고 한다. 러시아어로‘프리’는 ‘연안’이라는 뜻이고, ‘모르스키’는 ‘바다의’라는 뜻이다. 주도는 블라디보스토크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