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충남 천안에서 병원을 개원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팔순의 늙은 할머니가 아들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들어왔다.할머니는 10년 가까이 앞을 보지 못하여 제대로 거동도 못하고 늘 방안에서만 움츠려 지냈다고 한다.
불편한 노모를 걱정하여 아들은 병원에 가자고 권유했지만 “이제 살만큼 산노인이 무슨 병원 신세냐”며 고집을 부리시는 바람에 지금까지 제대로 진료 한번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료 결과 백내장으로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마당에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어 몸은 나날이 쇠약해졌고 거의 10년 동안 방안에서 앉은뱅이처럼 살아왔다는 것이다.
곧바로 백내장 수술을 실시하였고 할머니는 곧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들이 어렵게 마련한 수술비를 내밀었지만 ‘내 어머니’의 시력을 되찾아줬다는 마음으로 그 돈을 사양했다.
의사로서 뿌듯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운동부족으로 몹시 쇠약해 졌던 할머니는 조금씩 몸을 움직여 노인정에도 나가시고 간혹 텃밭에도 다니면서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어느날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할머니께서 찾아 오셨다. 표정도 한결 밝아졌고 기력도 많이 회복된 모습이었다.
“눈을 이렇게 밝게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직접 농사지은 고추인데 잘 말렸다가 겨울김장에 쓰세요.”
무거운 고추보따리를 지고 병원까지 혼자 찾아오신 할머님께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자리에 엎드려 나에게 큰절을 올리시는 게 아닌가? 너무 당황하여 나도 함께넙죽 절을 올리고 할머님을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주 얼굴도 못보고 갈 줄 알았는데 저승 가서 영감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며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덩달아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버스 타는 곳까지 할머니를 직접 배웅해 드렸다.
그 해 겨울 아주 맛있는 김장김치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그 이후에도 가을만 되면 고추 보따리를 보내주셨다.
때로는 옥수수 보따리도 보내시고 깻잎, 배추, 고구마까지 한번씩 다 보내주신 걸로 기억한다.
시간을 내어 한번 찾아가 뵈었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직접 찾아 뵙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얼마 전 할머니 소식을 들었는데 백수를 누리시다 호상을 치렀다고 한다. 마음 한 구석이 서운해지면서 새삼 그 고추보따리가 떠올랐다.
나화균·서울강남안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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