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중학교 무시험조치 이전에 초등학교를 다닌 40대 후반 세대. 걔 중 특히 대도시에서 자란 이들에게 골목길의 기억은 다른 이들과 사뭇 다르다.신나는 놀이터가 아닌, 과외공부를 끝내고 한밤 중지쳐 돌아가던 어둡고 힘겨운 길의 이미지다.
하기야 매일 점심시간마다 더운 밥을 해 온(보온 도시락 따위가 없던 때였으므로) 극성 엄마들로 교문 앞이 장사진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74년 고교 평준화조치 전까지의 중학교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원들이 밀집해 있던 서울 도심 광화문과 종로통은 밤이면 무거운 책가방으로 잔뜩 어깨가 휘어진 어린 학생들로 넘쳐 났다.
두 차례의 평준화 조치 후 30년 안팎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자정 넘어 아파트 단지를 오가는 학원버스 차창에는 아이들의 고개가 꺾여져 있고, 그 시간 귀가 엘리베이터에는 제 몸뚱이만한 가방을 짊어진 아래층 여자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든다.
아이들을 지옥 같은 입시교육에서 구해 내자던 평준화 조치의 명분은 깨끗이 소멸됐다.
당시 평준화 교육이 필요했던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그 때는 10여년간의 경제개발로 산업화 초기 단계에 진입하면서 모든 부문에 걸쳐 일정 수준의 균질한 인력이 대량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평준화 교육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 요구에 훌륭하게 부응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어느 정도의 교양과 식견을 갖춘 시민계급이 전제되는 정치적 민주화에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민주화는 고스란히 평준화 교육의 덕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바뀌어진 시대는 다른 틀을 요구하는 법이다. 획일적 대량생산 방식의 교육은 이미 효율을 다 했다.
이제 국제적 수준을 넘은 엘리트들이 각 부문에서 키워지지 않으면 사회의 업그레이드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평준화 교육에 대한 논의는 국가의 장기 발전전략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경제부처의 평준화 교육 재검토 주장을 교육부가 '남의 밥 그릇에 손대기'로 받아들여 발끈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많은 이들이 자녀들의 불이익을 우려해 평준화 교육체계를 포기하려 들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완전한 평준화 교육이란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개념이다.
이번 경기도 교육청의 고등학교 배정소동도 그렇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통학거리 등을 불만의 이유로 들고 있지만, 균등하지 않은 학교 차이가 근분원인이라는 것이 솔직한 분석이다.
평준화를 포기하면 자칫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아이의 학습능력을 결정짓게 돼 불합리하다는 반론도 있다.
그렇다면 사실상 일류 학교가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의 경우는 어떤가.
부모의 순전한 경제적 능력으로 거주지를 선택함으로써 보다 좋은 교육기회까지 덤으로 얻는 것은 합리적인가?
평준화 교육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분명한 만큼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옳으냐, 아니냐는 더 이상 논의나 검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시급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완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획취재부장 이 준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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