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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二八獨立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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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二八獨立宣言

입력
2002.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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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8일 도쿄(東京)의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유학생들은 그 해 1월6일 도쿄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민족의 독립을위해 구체적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 뒤, 그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서춘 백관수 김도연 전영택 등 10명을 선출했다.

이 가운데 전영택이 병으로 사퇴하고 이광수와 김철수가 새로 참가해 11명의 실행위원이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로 뜻을 모았다.

유학생들의 이런 움직임에 영향을 끼친 것은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평화원칙 14개조다.

이 평화원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민족자결주의, 곧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비록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전승국들의 이기주의때문에 껍데기만 남고 말았지만, 일시적으로는 조선인들을 포함한 약소민족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재미 한국인들이 미국 정부에 한국 독립을 위한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보도가 1918년 12월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지(誌)에 난 것도 재일 유학생들을 고무했다.

1917년11월의 러시아 혁명 역시 약소민족의 해방 운동을 격려하는 힘 가운데 하나였다.

이광수가 만든 선언서초안 1부가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해 국내에 반입된 후, 조선청년독립단은 2월8일 이 선언문을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ㆍ공사관과 일본 정부 각료들,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2ㆍ8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모임은 즉시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실행위원들은 연행됐지만, 한 달 뒤의 3ㆍ1운동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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