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ㆍ이라크와 묶어 ‘악의추축’이라고 명명하며 “미국은 이들 나라로부터 위험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부시는 그 뒤에도 이 나라들에 대한 국제 포위망의 구축을 촉구하며 고삐를 죄고 있다.이라크에 대한 폭격 명령으로 백악관 입주를 자축한 이래 줄곧 전쟁 지도자의 이미지를 쌓아온 이의 말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적의(敵意)의 칼끝이 북한을 표나게 겨누고 있는 데 대해 우리로서는 마냥 대범할 수만도 없다.
미국이 기다리지 않고 북한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한반도의 전쟁 상황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다시 냉전 속으로
물론 공적 발언에서조차 실조와 난조를 되풀이해온 지구촌의 이 최고 권력자가 무슨말을 하든, 가까운 시일 안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질 개연성은 매우 낮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중국의 존재다. 북한과 중국이 지금 정도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모험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폭격은 곧 중국과의 전쟁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한 미군이다. 3만6천여 명의 주한 미군을 일시에 한반도 바깥으로 소개하기 전에는 미국이 북폭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대항 폭격은 거의 필연적으로 미군의 희생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은 미국 국내에서 부시의 처지를 매우 어렵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앞의 두 요소보다는 억제 효과가 덜하지만, 한국측의 반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개연성의 높낮이를 떠나, 부시의 이런 전쟁 레토릭은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당장 한국 정부의 대북 화해정책에 찬물을 끼얹음으로써 한반도를 냉전의 틀 속으로 다시 쑤셔넣고 있다.
그리고 정략 차원에서든 이념적 소신에서든 대북 강경론을 주장하는 야당과 보수적 언론을 부추김으로써, 한국 내 힘의 관계를 조정하고 있다.
부시는 지금 워싱턴에서의 말놀이로 한국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부시가 이런 호전적 레토릭을 이내 중지할 것 같지는 않다. 9ㆍ11 직후 전세계인을 중세로의 시간 여행으로 초대한 ‘십자군’ 발언이나 제2차세계 대전때의 연합국 지도자 흉내를낸 연두 교서의 ‘악의 추축’ 발언이 보여주듯, 마니교적 선악 이분법에 바탕을 둔 전쟁 레토릭은 그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게다가 엔론 스캔들이 위협할지도 모를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굳건히하는 데는 전쟁지도자로서 애국주의를 선동해 미국인을 하나로 묶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없어 보인다.
우리의 골칫거리는 태평양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휴전선 이북에도 있다.
‘위대한 수령님 탄생 90돌을 맞는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새로운 비약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봉건왕조적 제목의 ‘공동 사설’에서 ‘우리 수령 제일주의’를 비롯한 4대 제일주의라는 것이 제창되는 사회, 그리고 그 공동사설을 남녀노소 전인민이 학습해야 하는 사회를 정상적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 사회가 이렇게 비정상이 된 것이 오로지 미국의 봉쇄 정책 탓만도 아니다.
자주외교속 北변화 유도를
우리는 지금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어쩔 줄 모르는 우방과 전근대적 제도ㆍ심성의 각질 속에 갇혀 있는 동족 사이에 끼여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견지하면서도 북한에 변화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상 그 둘은 서로 맞물려 있다.
미국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하고서는 북한에 변화를 요구할 수 없을 것이고, 북한에 변화를 요구하지 못하고서는 미국으로부터 자주성을 견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지혜와 강건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일이다. ‘국민의 정부’는 이 일에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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