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씨의 근간 시집 ‘쉬잇,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발행)을 읽다가 ‘나의 서역’이라는 시를 만났다.‘비망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의 첫 연은 이렇다.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동아시아 사람들의 불교적 상상력 속에서 서쪽은 지금 이곳의 더러운 땅 곧 예토(穢土)와 구별되는 먼 곳의 깨끗한 땅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청정한 땅은 부처의 거처다. 이 시 제목의 서역도 중국 서쪽의 구체적 땅을 의미하기보다는 흔히 극락이라고 표현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서방정토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시의 화자는 실물은 전부 헛된 것이라며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결핍의 형태에서 가장 찬란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핍으로서의 사랑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결핍이 채워졌을 때 열정은 배부름 속에서 시든다.
화자의 말을 빌리면, 만날수록 길은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린다.
문학사 속의 많은 연인들은 사랑을 달구기 위해서 정인(情人)과의 격리를 원했다.
그 격리가 생산하는 그리움의 편지들은 스탕달이 연애심리의 고갱이로 파악한 이른바 결정작용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리움은 부재하는 사랑이지만, 동시에 가장 뜨거운 사랑이다.
이 부재하는 사랑, 그리움으로서의 사랑은 병든 낭만주의를 끌고 가는 견인차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 또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병든 낭만주의자의 마음이다.
그 먼 곳이나 떠나온 고향을 서역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시 ‘나의 서역’은 그러나 이런 병적 낭만주의에서는 약간 비껴 있다.
거기에는 낭만을 충전하는 젊음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인용된 연의 첫 행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와 마지막 행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는 삶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중년의 심드렁한 말투다.
그러나 이 가장된 무심(無心)의 괄호 안에서 그리움은 화덕처럼 달궈져 있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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