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 1일. IMF로 건설회사가 하루에 몇 개씩 문을 닫는 와중에도 수십억원의 잔고가 있을 만큼 넉넉했던 우리 회사에 날벼락이 떨어졌다.은행에 갔던 직원이 사색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한 통장에 예치된 18억원중 15억원이 압류 상태라 3억원 밖에 인출이 안 된다고 했다.
당시 건설회사는 3개사가 서로 맞보증을 서는 제도가 있었다. 우리 회사와 보증 관계에 있던 회사 두 곳이 부도가 난 것이다.
“공사가 진행중인 현장이 9곳이나 있는데 준공도 못해보고 여기서 무릎을 꿇고 마는구나. 맨 손으로 시작, 20여년 동안 일구어 온 주택사업을 여기서 접는구나.”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잠도 이룰 수 없었다.
매일 밤을 술로 달래다 보니, 그때 마신 술이 남은 평생 마실 양보다 많을 정도였다.
동종업계 경영자들은 내게 “측근이나 임원이 먼저 등을 돌릴 테니 조심하라”고 넌지시 충고했다.
회사도 어려운데 같이 근무하는 직원까지 의심해야 하다니…. 더욱 비참했다.
회사가 최악의 상황으로 곤두박질치던 어느 날 임원들이 방으로 찾아왔다.
“이젠 다들 떠나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뭔가를 하나씩 꺼내서 슬그머니 내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400만, 500만원에서부터 많게는 6,000만원까지 사재가 담긴 통장을 들고 온 것이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들 때문이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 돈을 쓰지는 않았지만.
우선 건설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원자재인 땅을 파는 극약처방으로 회사의 자금을 안정시켰다.
그런 다음 업계 최초로 불필요한 옵션을 빼고 분양, 소비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마이너스 옵션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층별·향별 가격을 차별화 하는 공격적인 마케팅 기법을 구사했다.
과감한 공격 경영으로 외환위기로 꽁꽁 얼어붙었던 아파트 분양 시장에서 ‘동문 돌풍’을 일으키며 분양률 100%를 기록하는 등 돌파구를 찾아나갔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01년에는 부채비율을 190% 미만으로 낮추며 탄탄한 중견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만큼이나 감동과 보람이 있었던 일은 두어달 쯤 전에 사무실로 배달되어 온 떡시루 때문이었다.
이태 전에 32평형 아파트를 9,000만원 대에 분양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파주 운정지구 계약자들이 입주를 시작하면서 보낸 감사의 떡이란다.
떡 한 시루가 주는 이런 진솔한 보람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당당히 주택사업의 외길을 걸어가고 있다.
경재용ㆍ동문건설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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