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영숙 첫 소설집 '흔들리다'-"현실과 맞서라니… 그건 사기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영숙 첫 소설집 '흔들리다'-"현실과 맞서라니… 그건 사기야"

입력
2002.02.05 00:00
0 0

소설가 강영숙(36)씨가 문단 데뷔 초부터 강한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한 그는 1998년에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2년 정도 묻혔다가 지난해부터 문단의 집중적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개 등단 1년 전후에 지명도가 결정되는 한국 문단의 풍토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셈이다.

강씨가 묶어낸 첫 창작집 ‘흔들리다’(문학동네 발행)에는 3년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 중 11편이 실려있다.

등단작 ‘8월의 식사’와 최근작 ‘청색 모래’를 비교하면 그의 작품세계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어떻게 변화를 보이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8월의 식사’에서 다리를 절면서 건강식품 알로에를 파는 여자, 대학을 졸업하고 빈둥빈둥 놀다가 떠밀리듯 잡화 가게를 차린 남자는 생에 지쳐 피로하다.

‘청색 모래’에서 롤렉스 시계 유사품을 차고 다니는 공무원 남자와 병적으로 골동품 수집에 열중하는 붕어눈의 여자도 피로하다.

이렇듯 피로에 찌든 생활인들의 현실이야 말로 강씨 소설의 큰 뿌리가 된다.

그런데 피로를 견디는 방식이 달라진다.

‘8월의 식사’에서 주인공이 다리의 보조기를 떼어내고 세상을 향해 걸어나가던 것이, ‘청색모래’에서는 환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자는 불어나는 빚도 아랑곳없이 골동품과 구식 인형을 사들이는 아내와 씨름하다가, 아내를 끌고 사막으로 간다.

모래의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아내를 때리면서 종기를 터뜨리는 장면에 이르면 현실에 속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급기야 아내는 아이가 갖고 놀다 버린 인형처럼 머리를 박박 밀린 채 벽에 매달려 죽는다.

“현실의 문제를 환상에서 풀려는게 아니냐는 비난도 있다”고 작가는 담담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현실은 그로테스크한 환상으로 가려야 할 만큼 추악하다.

삶에 맞닥뜨릴수록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기’를 권하는 것은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검은 밤’에서 고통스런 어른의 세계를 일찍 봐 버린 아이는 마술을 부리고, ‘밤의 수영장’에서 여자들은 상처를 달래기 위해 5,000톤의 수영장 물 속으로 가라앉는 환상에 빠진다.

평론가 정홍수씨는 이런 강씨 소설의 인물들이 고독과 결핍을 앓고 있으면서도 “집요한 자기 대면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소설이라는 텍스트의 형식이 여전한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작가의 혹은 소설 주인공의 이 자기 대면의 의지가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환상으로 덮으면서도 삶의 섬뜩한 진실을 놓치지 않는 강씨의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은 ‘트럭’이다.

도난당한 트럭에서 무엇이 나왔을까. 트럭 안에 원숭이가 있었다.

원숭이는 이를 테면 괄호와 같다. 그 자리에는 어떤 것이든 넣어도 가능하다. 현실은 그런 것이다.

트럭 안에서 난데없이 원숭이를 만나는 것과 같다. 삶에서 부대끼는 괄호 때문에 피곤하고 지쳐간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강씨가 고단한 인생을 위로하기 위해 사랑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 줄까. 사랑이라는 환상에 속아줄 정도로 현실은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