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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민주화의 허상

입력
2002.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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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절절히 염원하던 기간은 매우 길었다.왕조체제를 벗어나려는 먼 시기의 노력은 빼더라도 광복 이후 야당들은 당명에 민주라는 글자를 넣어서 민심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라고 명확히 표시해왔다.

60년대 말 이래 개발독재를 앞세운 집권층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때 산업 현장과 대학에서 땀 흘리거나 공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지지자였다.

이들 무언의 동지들은 선거혁명이나 시민운동의 조력자로서 놀라운 성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민주화의 허상을 보고 허탈해 하고 있다.

몇 교수와 모인 자리에서 지난 10년이 이야기 주제가 됐다. “군사독재 아래서 저항문화의 파급력은 대단했지요. 황석영의 장길산, 오윤의 판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젊은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대단해요. 그러나 지금은 한물간 것처럼 느껴지지요. 시위현장 보도에서 운동권 노래가 나오는데 맥이 다 빠졌어요.”

당시 문학 음악 미술 등 각 분야로 확산된 민중문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세련될 기회가 없었다.

그 때 기자는 강권정치 아래서 확대 포장되는 저항문화의 한계를 지적한 적이 있었다.

엄격한 비판을 거치지 않고 미화된 문화는 완성도가 떨어져서 자생력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민주화운동은 결국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라는 성과로 나타났지요. 그런데 이들 정부가 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까요. 영국에선 전시내각을 이끌어 전쟁에 승리한 처칠이 평화시의 수상을 맡지 않았지요. 우린 민주화운동의 투사들이 전면에 나서 각 분야를 개혁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개혁의 대상으로 본 세력이 만만치 않은 위에 지역주의와 통일 방법을 놓고 국론이 갈라졌고, 경제정책이 실패했지요.”

국가를 경영할 경륜은 경험을 통해 쌓는 것인데 평생의 투쟁 목표가 군사독재의 타도였기 때문에 미래의 사회를 구상하고 이끌어 갈 공부는 모자랐는지 모른다.

정치지도자 간 선의의 경쟁은 능력 개발에 매우 중요하나 우리는 여당과 야당 간 그리고 같은 당의 지도자 간 악의의 경쟁만 계속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래서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사이에 계속되는 아름다운 경쟁과 협력을 전해들으면 이만저만 부럽지 않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 벌어진 부패와 뇌물수수는 다른 정권이 저지른 것과는 성격이 다른 거예요. 나라의 미래를 위한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높여주던 도덕성이 무너진 것을 뜻하지요.”

한 교수는 젊었을 때 가졌던 민주화운동의 열정이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 참여한 일부 부패세력에 의해 허무하게 녹아내린 것 같다고 한다.

개인적인 부패는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국가 조직을 동원한 부정이거나 조직적인 은폐는 더욱 실망스럽다고 했다.

스스로 비판적 지지자였다고 밝히면서 꼬집는 말은 날카롭기만 했다.

“새는 두 개의 날개가 균형을 잡아야 날 수 있는데 지금은 한 날개가 접혀진 속에서 한쪽 날개만 퍼덕이는 것이 아닐까요. 토론과 논쟁이 설 자리가 없어요. 오직 떼거리 비난만 있으니 합리적인 결론이 나오지 못하지요. 어느 쪽이더 잘못하고 있을까요. 좌인가요, 우인가요.”

지금 과거의 민주화세력이 힘을 잃고 있다고 한다. 국민의 지지가 힘의 원동력인데 민심이 떠난다는 것이다.

더구나 변혁운동의 원천이었던 학생운동은 지리멸렬한지 오래라는 지적이다.

“저는 광주로 상징되는 든든한 배경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하고 있지요. 지역주의의 폐단을 말해왔지만 호남은 반독재운동의 기반이기도 했어요. 그런 지역정서를 정치권에서 잘못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기반을 잃고 있어요.”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이 과거처럼 호소력을 가지기는 어려울 수 있다.

더구나 사회과학 서적에 관심 갖지 않고 가볍고 쉬운 것을 즐기는 젊은 세대에게 그런 분위기가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고 개혁도 늘 요구되는데 민주화란 구호에 가려졌던 자생력 결핍이 오래도록 영향을 미친다면 문제가 적지 않다.

최성자 논설위원

sj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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