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설 혁명 꿈꾸는 主父들 "남자도 음식준비 해야 여자고충 알지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설 혁명 꿈꾸는 主父들 "남자도 음식준비 해야 여자고충 알지요"

입력
2002.02.05 00:00
0 0

‘누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당하는 사람’을 생각해 주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설 연휴 안방에서 고스톱 치는 남편 중 몇 시간 간격으로 음식을 차려 나르는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남들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외치는 남자들이 모였다.

일을 갖고 있거나 살림에 소질이 없는 아내 대신 평소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살림하는 남자들.

이 ‘주부 남편’들은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평등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지만 친가와 처가, 형제들까지 모이는 명절의 풍토를 뒤엎기란 쉽지가 않았다.

설 연휴 친가에서는 며칠을 보내야 하고, 처가는 구색 맞추기로 잠시 들르면 된다?

장남이 아니면 설 차례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 천만의 말씀!

‘불평등한 것’은 못 참는 남자들이 풀어놓은 ‘설날전복기’.

● 고스톱 치다 싸우고, 음식 만들다 지치고

_‘살림치’인 아내가 설날에 모처럼 나서더군요. 물론 조금 후에 “와장창창” 소리가 났지요.

아내는 어머니하고 형수에게 쫓겨나 부엌에서 그냥 나왔지요.

역시 아무리 집안일에 젬병인 여자도 설날만은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인가 봐요.

_맞습니다. 집에서는 제가 음식 만들고 청소하고 다 하지만, 설날 친가에 가서 그러면 아내 입장이 오히려 난처해질 것 같아서 신경이 쓰여요.

하지만 처가에선 마음이 편해요. 처가에선 제가 전 부치고, 설거지하고 하고 싶은대로 다 합니다.

눈치보면서 노는 것보다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한데 그것도 쉽지 않은 거죠.

_저는 설날 형님 집에서 부엌에 가려고 일어서면 형님이 “꼼짝 말고 있어라”고 핀잔을 줘요.

정말 이게 아니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남자들은 새벽까지 고스톱 치다 급기야는 싸우기도 하고, 여자들은 한 편에 모여 몇 시간 간격으로 상을 차려 나르고, 아이들은 갈 곳 없이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게임이나 하고 말이죠.

_일 안 해 본 남자들은 알 수가 없죠. 저도 설날 몇 시간씩 전을 부치다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게 죽을 것 같더라고요.

며느리들만 그래야 한다는 건 우스운 것이죠. 넙죽넙죽 받아만 먹을 때는 맛있지만,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은 음식 냄새도 역겹다는 걸 보통 남자들은 모를 겁니다.

● 시부모, 장남의 ‘권위의 갑옷’

_설날이란 게 부부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에서야 제가 좋아서 집안 일한다지만, ‘명절 준비는 여자가 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어른들께는 어떤 합리적인 설득도 안 먹힐 때가 있어요.

_부모님뿐이 아니죠. 서울 잠실에 있는 큰 형님이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형님이 완전 ‘권위 덩어리’예요.

동생들이 모여도 남자들은 절대 부엌에 못 들어가게 하죠. 큰 형수가 죽을 지경이죠.

몇 년 전에 형수가 힘드니까 음식 마련 비용은 동생들이 보태자고 제안했지요.

그랬더니 형님이 “내 최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방방 뛰더라고요.

_그런데 집안 일 하는 남자라고 해서 ‘권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어머니와 제가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할 때, 가게 문닫고 집에 오면 저녁상 차려 놓고 기다리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도 파자마 입고 연탄불 갈러 나가시는 건 예사였죠. 그게 오히려 집안에서 영향력을 높이는 데 주효했던 것 같아요.

_그래도 그건 ‘권위다운 권위’지요. ‘부모님은 장남인 내가 모셔야 한다’, ‘남자는 부엌에 들락거리면 안 된다’는 인습의 권위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아요.

장남이면서 권위적인 남편을 둔 아내는 설날에 옆에서 보기 딱할 정도죠.

앞서 말한 저희형이 그런 경우인데 형수는 친정 어머니가 아픈데도 일하느라 설 연휴에 친정에 잠시 들르지도 못하더군요.

● 주부 남편들, 설날을 혁명시키다

_몇 년 전 설날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섰죠.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우선 설날에 아침이 아닌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고 형님댁에 통보했습니다.

항상 설 전날 가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형수가 아침 차리는 부담이크니까요.

그리고 저녁은 처가에 가서 해결하기로 했지요. 처음에는 형님이 많이 반대했는데, 동생들도 절 따르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죠.

_그래서 잘 됐습니까?

_놀라운 게, 오후가 되어 동생들이 떠나니까 그 권위적이던 형님도 형수를 모시고 드디어 처가를 가더라고요.

_저도 비슷해요. 큰 아버지 댁에서 설날 차례를 주도하는데 부담이 너무 큰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음식을 각각 나누어서 만들어가도록 제안했죠. 또 고스톱 대신 부부 대항 볼링이나 윷놀이를 하자고 제안해서 이제는 설날 연례 행사가 됐습니다.

_저희 집은 ‘친가 우선’이라는 설날의 고정관념을 깼죠. 연휴 중 반반씩 정확히 나눠서 친가 처가를 동등하게 가고 있습니다.

한쪽에 치우치면 한쪽은 당연히 서운한 마음이 들겠죠. 장인께서 저를 ‘아들’이라고 부르고 아껴주시는데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_제 경우는 약간 접근 방식이 달라요. 멀리 있는 친가는 안 가는 경우도 있지만 가까이 있는 처가는 꼭 들르죠.

‘거리’ 중심인 겁니다. 친가 처가를 구별할 필요가 뭐가 있나요.

어느 쪽이건 가까운 친지와 소규모로 모여 명절을 보내는 풍토가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_친지와의 관계 설정 외에 과도한 설 음식도 꼭 짚고 넘어갈 문제예요.

우리나라는 거나하게 차리는 것을 너무 강조하잖아요.

저도 집안 일 하고 요리학원도 다녀봤지만 상 하나 풍성하게 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화와 용역이 드는지잘 알 겁니다.

그냥 선조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몇 가지를 차례상에 올리면 좋지 않을까요?

_누구 한 명도 희생당하지 않는 설날을 위해 꼭 필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만 해도 몇 년 새 친지들의 설 풍속을 이렇게 바꿔 놓았으니 충분히 ‘평등하고 합리적인설’이 일반화할 날이 오겠죠.

_맞아요. 10년, 20년 후에는 오히려 지금과 같은 설 풍경이 더 희귀해지지 않겠습니까.

▼참석자

배춘복(46) : 사격선수ㆍ총포무역상 경력을 갖고 있다. 만 5년 된 ‘전업 주부 남편’. 둘째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어머니회’의 이름을 ‘어버이회’로 바꾸었다. 아이들과 함께 경비행기 세계 일주를 준비중이다.

김전한(40) : 시나리오 작가, 영화 조감독, 시인, 소설가 등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 최근 인터넷 포털 다음카페에 ‘살림하는 남편일기’를 쓰고 있다.

오성근(37) : 한의원 컨설팅업에 종사했다. 90년대 초 3당 합당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한 쪽 눈을 실명했다. 이후 아내와 함께 여성학을 공부하고 아내와의 약속에 따라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전업 주부로 변신했다. 농부가 되기로 한 약속도 곧 실행할 예정.

장준석(32) : 7개월 전부터 정형외과 원무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전업 주부’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집안일은 도맡고 있다. 결혼 전에도 살림을 잘 했고 아내도 요리학원에서 만났다.

정리=이진희기자

river@hk.co.kr

■여섯 남자 모여 主父클럽 만든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잘 알려진 여섯 명의 ‘주부 남편’을 중심으로 국내 처음으로‘주부(主父) 클럽’(가칭)이 만들어진다.

앞서의 네 명 외에 박창성 차영회씨가 참여할 예정인 주부 클럽은 단순한 ‘동아리’ 형태가 아니다.

이들은 “포럼도 할 수 있고, 공동의 저술활동은 물론 필요하다면 시위도 하겠다”고 말했다.

‘시위’라니? 남성이 주도하는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원숭이’처럼 희화화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매스컴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오성근씨는 “항상‘무슨 요리 잘 만드세요’라고 묻거나 설거지하는 모습만 반복적으로 찍는 방송 카메라에 질렸다”며“우리는 왜 전업 주부가 되었는지, 그 철학적 배경을 들려주고 싶지만 그 부분은 항상 빠진다”고 말했다.

오씨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의도를 왜곡하는 쇼 프로 등에는 앞으로 출연하지 않을 생각이다.

배춘복씨는 “주부 남성은 단순한 가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며 “남성이 교육에 적극 참여한다면 현재의 기형적인 교육 형태도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배씨는 아내로부터 아이들의 교육권을 넘겨받은 후, 모든 과외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아이들과 여행을 자주 떠나며 넓은 세상을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배씨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공부와 담 쌓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며 “자신에게 맞는 길을 직접 찾을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인 큰 아들은 2학년인데도 특기 장학생으로 3개의 대학이 입학을 허가한 상태이고, 영어회화에도 취미를 붙여 독학으로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을 쌓기도 했다.

이들은 주부클럽을 통해 주부 남편들이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더욱 확대해 나갈 생각이다.

일단 이 달 중 출범과 함께 홈페이지를 만들고 뜻을 같이 하는 남성들의 힘을 모아볼 계획이다.

또 TV출연을 하더라도 남자들이 많이 보는 시간대로 제한하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오성근씨가 주부클럽 출범에 맞춰 발표할 선언문은 이들의 각오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시작한다. “이 땅엔 남자들만 있어 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이진희기자

riv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