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2월4일 국문학자 양주동이 74세로 타계했다. 양주동의 호는 무애(无涯)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일제 시대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해방 뒤에는 동국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가르쳤다.무애는 시인으로서 나이 스물에 시지(詩誌) ‘금성(金星)’을 발간하고 스물아홉 살에 시집 ‘조선의맥박’을 상재하기도 했으나, 한국 문화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기여는 고전시가 연구에 있다.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1942)와 ‘여요전주(麗謠箋注)’(1946)는 고전문학자로서 무애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기념비적 저서다. 자신의 학문에 대한 긍지가 유달랐던 무애는 국보(國寶)를 자처하기도 했다.
‘사뇌가전주(詞腦歌箋註)’라고도불리는 ‘조선고가연구’는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수록돼 전하는 향가 25수에 대한 주석서다. 사뇌가는 향가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사뇌(詞腦)’의첫 글자를 음독(‘사’)하고 둘째 글자를 훈독(‘골’)하면 향(鄕)의 의미인 ‘스굴’(=시골)과 비슷하게 된다.
향가의 본격적 연구는 일본인 학자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에서 시동이 걸렸다. 무애는 고대 민족문화의 가장 찬란한 부분이 외국인의 손을 통해 규명되는 것에 충격을 받아 향가 연구에 뛰어들었고, 오구라의 오류를 상당 부분 바로잡아 ‘조선고가연구’를 내놓았다.
‘여요전주’는 고려시대 가요에 대한 주해서로, 1939년부터 40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원고를 보완한 것이다. 제3부 평설에는 ‘가시리’와 ‘서경별곡’에 대한문학적 비평과 감상을 수록했는데, 특히 ‘가시리 평설’은 무애 특유의 의고적(擬古的) 문체가 문학적 감수성 속에서 격조와 화사함을 얻은 명문으로 꼽힌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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