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2월2일 영국의 철학자 겸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98세로 타계했다.러셀의 위대함은 물론 그가 수학과 철학 분야에서 이룬 업적에 있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쓴 ‘수학의 원리’(1910~1913)는 그 학문적 업적의 한 표본이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그가 취한 사회적 입장들은 인간의 앎을 넓히려는 노력이 정의와 관용을 넓히려는 노력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20세기 평화운동에 대한 러셀의 기여는 철학이나 수학에 대한 기여 못지 않다.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징병거부 단체에 들어가 양심적 반전주의자와 탈영병을 돕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쫓겨나고 가택 연금되었다.
1918년에는 ‘트리뷰널’지에 사회주의를 찬양하고 미군을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가 6개월간 투옥됐다.
소련을 방문한 뒤 볼셰비즘에 대해 환상을 버린 뒤에도 평화운동은 이어졌다. 1961년 아인슈타인, 졸리오퀴리등과 함께 벌인 반핵 캠페인은 그를 다시 일주일간 감옥으로 보냈다.
그 때 그의 나이 89세.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사르트르와 함께 ‘러셀 법정’을 주관하며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벌였고, 타계하기 직전인 1969년 12월에는 소련 작가동맹이 솔제니친을 제명한 것에 대해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에게 격렬한 항의편지를 썼다.
러셀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이 “사랑의 갈구, 앎에 대한 목마름, 고통 받는 이들과의 친교”라는 세 가지 열정에 이끌리며 이어졌다고 술회했다.
러셀은 네 번 결혼했다. 미국인 퀘이커 교도였던 첫 부인과는 함께 여권운동을 벌였고, 두번째 부인 도라 블랙과는 체벌도 의무학습도 없는 대안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네번째 부인 에디스 핀치와는 마흔 살 차이였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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