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월30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길에 암살당했다.이 사건의 배후는 육군 중장 강문봉으로 밝혀졌다. 공식 문서에는 김창룡의 생년이 1920년으로돼 있어 죽을 때 나이가 36세지만, 그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16년생이다.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
김창룡의 삶은 한국현대사의 주류를 자처해온 우익 세력의 가장 흉한 몰골을 표본화하고 있다. 1940년 관동군 소속 헌병 보조원으로 군대 경력을 시작한 김창룡은 북만주에서항일 운동세력을 짓누르며 관동군 오장(伍長)으로 해방을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친일 경력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남으로 탈출했고, 조선경비대에 들어가 졸병 생활을 하다가 1947년 1월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3기생으로 들어가 3개월 뒤 소위로 임관했다.
그때부터 그의 이력은 승승장구였다. 김창룡이 관동군 시절부터 익힌 첩보와 공작 기술 그리고 무자비한 파괴ㆍ공격 성향은 최고 권력자 이승만의 필요에 적절히 부응했다.
그가 소위가 된 1947부터 암살된 1956년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커다란 시국사건 뒤에는 거의 어김없이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김창룡은 군대 정보기관의 우두머리로서 닥치는 대로 적발하고 체포하고 살해했다.
그의 손에 걸려든 사람들 가운데는 진짜 공산주의자도있었으나, 단순히 이승만의 정적 그리고 김창룡 자신의 군대 내 라이벌도 숱하게 끼어있었고, 많은 수는 자기도 모르게 용공 조작 사건에 휘말린 애매한 사람들이었다.
지난 1992년에는 백범 김구의 암살도 그가 지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서울 관악산 근처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8년 초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장군묘역으로 옮겨졌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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