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에서 거창하게 내 건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는 플라톤의 어록에 감탄할 필요도 없다.이미 ‘지옥의 묵시록’에서 윌라드 중위(마틴 신)가 말했다.
마지막에 분대장 에버스먼 중사(조쉬 하트넷)가 중얼거리는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어쩌다 그렇게 될 뿐이지”라는 말에 침울해 할 이유도 없다.
‘플래툰’에서 크리스 역을 맡은 마틴 신의 아들 찰리 신이 헬기를 타고 전장을 떠날 때의 느낌과별로 다르지 않다.
볏단 쓰러지듯 적군은 1,000명이나 희생됐다. 그런데 겨우 19명 죽은 것을 놓고 ‘처참한 패배’란다.
실소가 나오지만 어쩌랴. 지구의 최강자인 그들에게 승리는 ‘단 한 명의 희생도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쉽게 확인할수 있었다. 실수로라도 한 명의 전사자가 나올까 대통령까지 조마조마해 하는 모습을.
더구나 그들에게는 월남전이란 치욕적인 상처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지금도 남의 전쟁에 가냐고? 세계 평화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미국이 자랑하는 특수부대 정예 용사들은 동족을 마구 살상하고 UN의 구호식량까지 착취하는 민병대 대장 모하메드 파라 에이디드의 두 부관을 납치하기 위해 1993년 10월 3일 오후 반군인 민병대가 장악한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시내에 겁 없이 들어갔다.
아무리 적진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시간 만에 작전완료. 계획은 완벽했다. 현지 정보원의 정확한 정보, 지상과 공중의 입체 작전. 그러나 작전은 민병대가 쏜 구식 로켓포 한 방에 박살이 났다.
레이저망도 통과한다는 무적의 헬기 ‘블랙호크’가 추락했다.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놀라서 소리치는 그 한 마디에 이미 승부는 갈라졌다. 그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다.
패배를 생각하지 못한 인간은 패배의 순간을 맞이할 줄도 모른다.
인질납치 작전이 동료구출작전으로 바뀌면서 전장은 그들에게 위대한 평화의 실현 현장이 아닌 지옥이 됐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그 18시간의 기록이다.
할리우드의 큰 손인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글래디에이터’의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들에게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는다.
총알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낯선 전장에서 한가롭게 비인간성을 한탄하거나, 동료의 부상과 죽음 앞에 잔뜩 애도의 눈물을 흘리며 비극성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사치이고, 영화적 비현실이라고 비웃는 듯하다.
“절대로, 혹 실수로라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전장을 중계한다 해도 이렇게 기 막힌 리얼리즘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모로코의 대형 세트장에 6~8대의 카메라를 걸어놓고 작전의 책임자인 윌리엄 소장(샘 세퍼드)처럼 전투를 지휘한다.
다양한 앵글과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잡은 극 사실적 전투장면이 ‘라이언 일병구하기’ ‘글래디에이터’를 능가한다.
마치 각본이 없는 듯한 전투 드라마(사실은 치밀한 각본의 산물)가 2시간 20분 동안 관객의 시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실패한 작전이기에 영웅도 없다. 군 행정병로 근무하다 전장에 나선 그림스(이완맥그리거)나 선임하사 후트 중사(에릭 바나)나 죽은 병사들이나 모두 ‘한 명의 전우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특수부대 강령을 지키려 했고, 명령에 따랐고, 죽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적에 대한 적개심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 전쟁을 “아무것도 아니야(Nothing)”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널리스트 마크 보우덴이 이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쓴 실패한 전투실화 ‘블랙 호크 다운:현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를 통해 리들리 스콧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그는 “전쟁의 실체를 해부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실체를 전우애, 휴머니즘, 허무와 공포, 한심한 군의 명령, 오만한 미국에 대한 경고 그 어느 것으로 읽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오금저리는 경험만은 분명히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블랙 호크 다운’은 18일 북미지역에 개봉해 ‘반지의 제왕’을 밀어내고 그 주 박스오피스 1위(2,900만 달러)를 차지했다.
국내 2월 1일 개봉.15세 이상 관람가.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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