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국민의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시기에 축구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직접 들어볼 기회를 가졌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21일 국내 언론사 체육부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가진 오찬간담회가 그 기회였다.
김 대통령은 이날 축구선수를 한다면 어느 포지션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골키퍼도 좋을 것같고 게임을 리드하고 공격에도 가담하는 미드필더도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김 대통령은 소장의원시절 의원들 친선경기에서 골키퍼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흥미로운 대목은 '전체게임을 리드하고 공격에도 가담하는 미드필더'라는 대답이었다.
대통령의 말을 정확히 해석하자면 미드필더 중에서도 창조적 능력이 뛰어난 게임메이커(또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축구에서 게임메이커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김 대통령의 말은 여러 의미를 함축한다고 나름대로 새겨 보았다.
그런 한편으로 역대 대통령을 축구선수로 뛰게 한다면 각자 어느 포지션이 어울릴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김 대통령은 게임메이커로서 적합하다는 의견이었다.
게임메이커는 피아(彼我)의 상황을 동시에 파악해서 즉각 분석ㆍ대처하는 자리다. 사전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논리가 정연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김 대통령에게 잘 맡는다는 얘기다. 적어도 IMF환란 극복만큼은 김 대통령의 게임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잘 입증해준다.
학창시절 축구선수를 했다는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훌륭한 풀백감으로 꼽혔다.
풀백은 공수능력을 겸비해야 하는데 특히 공격가담 때는 상대의표를 찌르는 기습능력이 요구된다. 금융실명제, 하나회제거 등 기습적인 개혁정책을 밀어붙인 김 전대통령의 성격에 잘 어울린다.
육사재학 시절 골키퍼를 맡았던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오히려 스트라이커가 적합하다는 의견이었다.
파괴력이있고 몸싸움에 강한 스타일이어서 그렇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주로 등번호 10번을 달고 뛰는 게임메이커는 공수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승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포지션으로 자리잡았다. 게임메이커의 패스 한방이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특성과 중요성 때문이다.
마라도나(아르헨티나)는 가장 위대한 게임메이커로 꼽힌다.
86년 멕시코대회 때는 스트라이커로 뛰었지만 90년 이탈리아, 94년 미국대회에서는 게임메이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대회 때 아르헨티나는 전력이 강하지 않았지만 마라도나의 게임메이킹 능력에 힘입어 준우승했다.
당시 우승팀 서독(현 독일)도 마테우스라는 걸출한 게임메이커를 보유하고 있었다. 98년 대회 때 프랑스는 지단을 앞세워 우승했다.
일본의 축구가 우리보다 한 단계 앞선 위치에 가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
90년대초 게임메이커 라모스의 등장이었다. 브라질서 귀화한 라모스는 92년 베이징(北京) 다이너스티컵 결승서 한국을 꺾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일본은 게임메이커 중심의 축구로 바꿔나갔고 라모스의 뒤를 이어 나나미 히로시, 나카타 히데토시, 오노 신지 등 재능있는 게임메이커가 탄생했다.
한국대표팀의 고민은 게임메이커 부재에 있다.
한국팀의 득점이 측면돌파나 기습적 중거리슛에 의존하고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스루패스에 의한 득점이 없다는 점도 게임메이커의 부재를 잘 말해준다.
게임메이커가 없는 팀이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렵다.
축구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조율사가 없는 사회는 발전이 더디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대표팀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게임메이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기창ㆍ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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