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인 29일은 여성부가 출범한지 1년이 되는 날이다.성평등부라는 영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성부의 신설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이라고 한다.
그만큼 성차별의 관행이 두터운 사회라서 여성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늦더라도 이를 국가 행정 차원에서 시정해보려는 노력이 시작된 셈이니 만큼 기대가 크다.
가부장 중심적인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과 한국, 일본 및 베트남 중에서도 유독 한국에 남존여비의식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성차별이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욱 강하게 된데는 역사적인 경험의 차이가 작용한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성리학적인 통일의 정도가 강했지만 근대 이후 중국에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일환으로 5ㆍ4신문화운동 같은 경험이 있었던 반면 한국의 경우 그런 경험이 없었던 점이 큰 요인이다.
일제치하라는 상황에서는 민족의 존망이라는 명제가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의 신장 같은 측면이 먼 미래의 이상으로 자리매김 될 수밖에 없었다.
유림(儒林)의 근왕운동(勤王運動ㆍ왕을 옹립해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중요하던 상황에서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상식적인 주장이 발붙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해방 후라고 해서 이와 같은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냉전체제와 분단이라는 상황이 고도성장의 신화와 맞물려 민족, 남성, 지배적 다수가 중심이 되는 사고방식을 확대, 재생산해냈다.
유교의 본고장인 이웃나라 중국에서 사회, 제도적인 측면에서 성차별의 격차를 좁혀나가는 동안 한국에서는 그 격차가 좁혀질 기미가 없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60년대의 농촌에서는 정월 초하룻날은 여자들이 이웃집에 마실 가는 일을 삼가야만 하였다.
정초에 여자가 첫 손님으로 와선 재수가 없다는 마을 사람들 사이의 불문율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식거리가 없던 그 시절 시제(時祭)의 소문이라도 있으면 십리 산길을 마다 않고 이 동네 저 동네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제사 끝나고 남는 음식을 얻어가려고 줄을 서기 위해서. 그렇지만 아무리 일찍 가도 여자 아이들의 몫은 땅꼬마 남자아이들 몫까지 다 나눠 준 다음에 남는 떡고물 부스러기뿐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여자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허탈감 뿐이었다고나 할까.
개발지상주의적인, 남성 중심적인 이 땅에서 여자로 길러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도처에서 불평등의 덫을 보고도 당연히 여기면서 그래도 남는 고물부스러기를 위해 기다리는 일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다행히 80년대 이후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사회 각 부문에서의 운동과 더불어 여성운동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싹을 틔워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제 한 돌을 맞게 된 여성부의 신설도 그런 운동의 가시적인 성과 중 일부이다.
모성보호 관련법의 통과, 호주제 폐지논의의 활성화, 보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론 대두, 여성 지방의원들의 바람직한 활약상, 성폭력의 사회문제화, 금남의 지역으로 알려진 직업영역에의 여성 진출, 여성채용할당제 논의의 활성화 등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전진이 눈에 띈다.
불과 20년 남짓 기간의 성과로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성차별의 관행은 우리사회 도처에 남아 있다.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존재, 모성보호 관련법 시행상의 한계, 여성차별 시정명령제의 무산, 전문연구직 여성의 취업장벽, 재산 상속상의 차별, 그늘에 묻혀 있는 성희롱 사안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진정한 민주사회란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이다.
성의 구별은 존재하되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없는 진정한 민주사회의 구현을 위해 모두 발벗고 나서야 한다.
어머니, 아내, 딸이 좌절하는 사회에선 가부장을 포함하여 아무도행복할 수 없으므로.
/윤혜영ㆍ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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