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무소에서 설계사로 3년째 일하는 김모(28ㆍ여)씨.하루 10시간 이상 마우스를 작동하며 작업대에서 씨름한다.
그녀는 어깨 통증으로 지난 해 5월부터 병원에 다니고 있다. 물리치료도 받고 보약도 네 번이나 지어 먹었지만 별 차도가 없다.
병원에서는 ‘푹 자고 ,운동하고, 스트레스와 술을 피하라’고 하지만 밀려드는 업무, 잦은 야근과 회식에 어느것 하나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증권사 데이트레이더 윤모(27ㆍ여)씨는 이제 통증이 팔다리 마디마다 퍼져 잠을 설칠 정도다.
하지만 화장실 다녀오기도 불안할 정도로 격렬한 업무 탓에 지금도 종일 모니터에 매달려 있다.
외국계 음반회사에서 기획을 맡고 있는 박모(30ㆍ여)씨는 미국 본사와의 서류 교환을 위해 자신의 책상 앞에만 2~3대의 모니터를 놓고 일하며 평균 퇴근 시간이 밤 11시 정도다.
마사지 망치를 갖고 다니며 여자 동료들과 어깨를 두드려주고, 틈나는 대로 찜질방을 찾는다.
어머니세대는 ‘한창 젊은 것들이…’ 하며 끌끌 혀를 차지만 그들은 분명 환자다.
‘골병’을 앓는 20~30대 여성들이 늘어가고 있다.
목, 어깨, 팔 및 팔꿈치 등 관절 부위에 나타나는 이 같은 통증은 ‘근골격계 질환’(MSD)이라 불리는, 직무 연관성이 높은 직업병이다.
원진녹색병원 임상혁 보건의학과장은 “부품조립등 생산직 남성들이나 텔레마케터, 전화교환원 등 일부 여성 직종에서 흔하던 근골격계 질환이 사무직 여성 전체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왜 더 아플까
200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금융ㆍ통신 등 사무직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업무성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한 응답자가 전체의 75.8%에 달했다.
김철홍 인천대 산업공학과 교수(노동과학연구소장)은 “근골격계 질환 발병률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2~8배가 더 높다”고 말한다.
그는 “젊은 여성들이 호소하는 통증은 보통 40~50대 전업주부들이 느끼던 손목ㆍ어깨 통증과 같은 증상”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의 몸이 노령화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정진주 노동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여성의 작업환경을 특징으로 설명한다.
“상대적으로 컴퓨터작동이나 전화상담 등 단순반복적인 업무에 많이 종사하고, 불편한 사무환경에서 오랜 시간 고정된 자세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육아와 가사노동을 병행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큰 원인”이라고 말한다.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예고 없는 갑작스런 업무량 증가’와 ‘조직내에서의 무시’에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적절하게 대응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 지적된다.
■대응은 이렇게
“남들보기에는 그냥 ‘여자들 엄살’일 뿐이다. 그래서 내놓고 병원에 가기도 힘들다”고 여성들은 말한다.
실제로 여단협 조사에서도 통증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여성이 전체의 57.83%에 달했다.
임상혁 원진녹색병원 보건의학과장은 “물리치료나 투약ㆍ수술 등 적절한 치료 없이 통증을 방치하면 장애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예방을 위해서는 가벼운 스트레칭이나 조깅ㆍ수영과같은 운동, 불편한 사무환경을 인체공학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이 질환에 대한 인식 전환을 가장 큰 과제로 꼽는다.
정진주 연구원은 “근골격계 질환은 이미 외국에서는 작업중 사고 등 전통적 형태에 못지 않은 제2의 산업재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2000년 총 직업병 건수 중 근골격계 질환이 64%를 차지하고 있다.
김철홍 교수는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인식이 직장 내에 확산되고,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의 종류와 빈도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산업안전보건법에는 ‘영상단말기(VDT)취급 근로자의 작업관리지침’ 등 근골격계질환 관리를 위한 규정이 있지만 형식적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진주 연구원은 “현지침은 사업주가 작업관리에 참고하는 권고 수준이라 실효성이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법규처럼 작업장 평가와 위험요인 교육을 법에 명시하고 작업장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체제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사무직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근골격계 질환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있지만 직장 내 인식은 아직 초보적 수준이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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