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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어느 소수주의자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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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어느 소수주의자를 위한 변명

입력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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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동창회 모임에서 금연이 화두가 됐다. 여러 명이 담배를 끊었다고 자랑했다.그런데 한 친구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역시 1월 1일부터 담배를 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보란 듯이 담배연기를 공중에 뿜어가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난 이주일 때문에 못 끊었어. 아니 안 끊었어."

궤변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변명 아닌 변명은 이렇다.

그는 스스로, 순전한 자신의 의지의 소산물로 담배를 끊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이 무슨 특별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금연 열풍에 휩싸여 담배를 끊는 것처럼 비춰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아이구, 저 알량한 자존심. 이제 별 핑계를 다 대는구나"라며 웃어넘겼지만 난 그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금연 열풍에 동참하지 못한 처지로서 사실 위안도 받았다.

새해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신드롬이 부쩍 많이 나타나고 있다.

SBSTV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잘 먹고 잘 사는 법'의 여파로 슈퍼마켓에 채소가 동이 나고 고기와 우유가 안 팔린다.

채식이 몸에 좋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이상구 박사의 엔돌핀이나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이나, 또 작년의 비타민C 열풍처럼 한바탕 불다가 사라질 것이 뻔하다.

국민건강을 증진시켰다는 아무런 보고도 없이, 우리를 한때 달뜨게 만들고 화젯거리로 오르내리다 잊혀질 것이다.

권위있는 누군가가 고기와 우유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한 말씀 하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내리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다.

요즘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자. '괭이부리말 아이들(김중미 지음)' '봉순이 언니(공지영 지음)'가 부동의 1, 2위를 다투고 있다.

순전히 MBC TV의 오락프로그램 '! 느낌표'의 한 코너인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 차례로 소재로 등장한 덕분이다.

5~6주 이상 베스트 셀러 1위에 오른 무명 작가의 '괭이…'는 무려 30만 부 이상이 나갔고 '봉순이…'도 비슷하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독서를 하지않는 사람과 동격 취급을 당한다.

두 개그맨에 의해 인터뷰 당하는 사람의 독서 취향과 편력은 난도질 된다.

책으로서의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오페라의 유령'도 영화와 공연이 뜨면서 엄청 팔리기 시작했다.

제2창작물을 보고 원전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관객 없기로 유명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그의 독특한 영화세계에 갑자기 관심이 생긴 게 아니다.

인기를 끌었던 SBS TV 드라마 '피아노'의 한억관(조재현)을 보러 가는 것이다.

매스컴의 위력은 수없이 증명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TV 자신이 그걸 잘 알고 있고, 또 효과적으로 주술을 거는 노하우의 귀재이다.

여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신드롬을 포장홍보함으로써 그 시너지 효과까지 울궈내는 방법까지 잘 안다.

금연하고, 채식하고, 책을 읽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과 분위기에 휘둘려 하는 사람은 격(格)이 다르다.

신드롬은 다수에 끼지 못한 불안과 초조를 노린다. 그리고 그걸 상품화하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옭아맨다.

신드롬이 적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 아닐까. 주체적인 결정만이 우리 스스로에게 존엄과 권위와 책임을 줄 것이고, 어떤 의도를 지닌 '권력(또는 세력)'이 틈새를 파고 들지 못할 것이다.

난 그래서 이주일 때문에 금연 결정을 미뤘다는 내 친구의 건강이 사뭇 걱정되지만, 그 고집스런 소수주의적 태도만은 평가한다.

한기봉 문화과학부장

kib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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