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선생이 남긴 '남 모르는 나의 아들'이란 짧은 글의 일부다.불문에 몸 담았던 그는 그 뒤로 가족과 같이 살지를 않았고, 그 일을 입에 담은 일도 없어서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만주 시베리아 일본 등지를 방랑하며 국권을 되찾을 궁리에 몰두하고, 3ㆍ1독립운동을 주관하다 옥고를 치르고, 틈틈이 문필생활에 정력을 쏟던 만해는 만년에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고단한 육신을 의지했다.
쉰 넷에 만난 동향 출신 반려자와의 사이에 얻은 딸(韓英淑)은 지사가 일제말기를 견디게 한 힘이요, 이유였다.
그 딸은 지금 심우장을 가슴에 담고 만년을 살고 있다.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가난한 무부(武夫)의 아들로 태어난 만해는 과거공부 하기를 바라는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항아 기질을 엿보이기 시작한다.
열 세 살에 두 살 연상의 처녀와 조혼을 하지만, 가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울어 가는 국운과 세상의 부조리에 절망한 나머지 말술을 마시는 탕자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런 고민을 해결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 서울 길에 올랐다가, 그보다 공부가 급하다는 자각에서 백담사로 발길을 돌렸다.
■존재조차 몰랐던 만해의 아들이 북한에서 다섯 자녀를 둔 사실이 보도되어 만해 연구자들을 놀라게 했다.
1904년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나라를 보위하라는 뜻에서 보국(保國)이란 이름을 주었다니 만해의 나라사랑을 짐작하겠다.
6ㆍ25 때 공주군 인민위원장을 지낸 그는 1ㆍ4후퇴 때 월북해 김일성 주석에게서 환갑상을 받는 대접을 받았다 한다.
지사의 자손들이 남북에 갈려있는 분단현실이 새삼 가슴을 찌른다.
그들이 한번 만나본다면 속세의 연에 무심했던 그의 영혼에 위안이 될까.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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