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선거의 해다.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10여 명이 출사표를 냈다.
여야 후보 지명을 위한 새로운 경선제도가 도입되고 지방선거, 보궐선거까지 겹쳐 일년 내내 선거 열기가 뜨거울 것 같다.
그런데 달아오르는 정치판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투표권을 행사할 국민들은 냉담하다.
잇달아 폭로되는 각종 부패ㆍ비리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김대중 대통령은 연두기자 회견에서 "매일 같이 터져 나오는 게이트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다"고 자인하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 몇 마디로 상황이 반전되기는 힘들 것 같다.
현 정권의 부패 주모자는 공직자 본인은 물론이고 부인, 동생 등 친인척까지 확산되어 있다.
청와대의 경우는 청소부에서 수석비서관에 이르기까지 개입된 사실이 밝혀졌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서로 견제하기는 커녕 비리에 상호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양상마저 보여줘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틀마저 뒤흔들고 있다.
지도층 인사들이 거미줄처럼 이권 커넥션을 형성하고 뒷거래로 사리사욕을 채운 사건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한없는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대통령제는 지도자의 절대권력을 막아보려는 민초들의 열망이 담긴 제도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거대한 땅덩어리만 있을 뿐, 통치자도 국가체계도 없는 신생국가에 불과했다.
사회불안을 해소하고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인정 받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대통령제다.
그들은 국민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했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권력자의 욕망을 견제하기 위한 삼권 분립을 주장했다.
미국은 이 삼권 분립의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외교ㆍ군사적으로 강력한 권한을 가지지만 의회가 그 힘을 견제할 수 있고 법에 의해 권한이 제한되는 대통령 개념을 창안하였다.
즉 대통령제도는 통치자의 권력 남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우리나라도 1948년 미국식 대통령제를 시행한 지 반세기가 흘렀다.
이 가운데 32년간은 군부독재, 9개월은 내각책임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정한 대통령제가 운영된 것은 불과 21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적 굴곡에 적응해온 탓인지 우리사회에서는 대통령의 제왕적권위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왔다.
또한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는 정치ㆍ사회ㆍ경제의 제 요소와 유착되어 관행처럼 여겨져 왔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들이 지도자를 경멸하면서 겉으로만 따르게 하고 정부를 불신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젊은이들이 보고 배워야 할 성공한 기업인, 정치 지도자, 고위 공직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지탄 받는 사태는 우리 사회의도덕과 양심을 부패하게 한다.
예컨대 국민들은 '나도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청렴하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는 저렇게 부정하는데 이쯤이야' 하는 식으로 법을 어기고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합리화하게 된다.
한국현대사의 암흑기인 군부독재 시절에는 대다수의 국민이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우리 나라도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문민정부와 여야 정권 교체까지 이룬 지금, 국민들은 정치와 국가의 미래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정부가 어떠한 말을 해도 믿을 수 없는 신뢰의 공항에 접어들었다.
이제라도 여야는 정부는 왜 존재하며, 정치인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결코 선출되는 제왕이 아니다. 더 이상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우롱해서는 안 된다.
/김정원 세종대 교수 국제정치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