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8학군 소사교육특구 ‘강남 8학군’의 소사(小史)를 돌이켜 보면, 강남 교육열병의 원인제공자는 명문고를 반 강제적으로 이전시키며 강남 개발 드라이브를 걸었던 정부라는 결론이 나온다.
서울 강남 지역 개발은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 확정에 따른 구획정리사업으로 시작됐다.75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으로 아파트시대가 본격화됐지만 개발 열기는 생각만큼 달아오르지 않았다. 학교가 없어 교육문제를 우려한 학부모들이 이주를 꺼렸기 때문.
당시 강북 고교의 강남 이전 업무를 담당한 교육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부는 강남 개발 활성화를 위해강북 명문고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면서 강남 이주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76년 경기고, 81년 서울고 등 양대 명문고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삼성동등으로 옮겼고, 한때 학생 부족현상으로 강북 학생을 버스로 실어 나르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후 80년대 초반 휘문고, 경기여고 등 강북 지역 14개 명문고가 속속 옮겨오며 교육여건이 우월해지자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아파트 분양권 전매금지조치가 등장했고, 강남은 ‘블랙홀’처럼 부유층과 우수 학생들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84년에는 고입 ‘거주기간제’가 도입됐고, 거주기간은 한때 46개월까지 늘어났다. 백약이 무효이던 강남 신드롬은 90년대 중반 대입에서 내신성적반영 폭이 확대 되면서 잦아들었다. ‘내신이 불리해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불만 속에 8학군 신화도 퇴색해 갔다.
그러던 강남8학군이 최근 되살아난 것은 최근 교육정책의 부작용 탓이 크다. 98년 고입 연합고사가없어지면서 중학교 내신이 중요해지고, 쉬운 수능시험에 각종 특기적성 교육이 강조되면서 재학생 맞춤 학원, 선행학습 학원, 각종 특기학원 등이 ‘교육구매력’이 큰 강남지역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대입 명문고가 아니라 대입에 유리한 학원을 찾는 또 다른 모습의 강남 8학군병이 도진 것이다.70,80년대 밀어붙이기식 학교 이전 정책이 또 다른 일그러진 모습으로 강남을 뒤덮고 있는 셈이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대치동 1.5km에 학원 150곳…1년 대기도
은광여고 2학년 정모(17)양은 방학 중인 요즘 대학생이 된 느낌이다. 대학생들 처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학전문학원에서부터 사회탐구학원 국어교실 영어학원 등 5개 학원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듣기 때문이다.
정양은 “종합학원에서 모두 수강할 수 있지만, 최고라고 소문난 전문학원들만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정양의 수강신청을 위해 정양 가족들은 지난 10월 전쟁을 치렀다. 부모님과 대학생인 오빠가 새벽부터 학원 앞에서 줄을 서서 가까스로 수강증을 구한 것이다. 수강증을 구하지 못한 사회탐구학원의 수강증은 수소문 끝에 강의를 듣지 않겠다는 학생을 찾아 40만원의 웃돈을 주고 확보했다. 그러나 유별나 보이는 정양은 대치동 아이들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정양이 하루를 보내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은마아파트입구까지 약 1,500m 거리에는 각종 학원들이 빼꼭이 들어차 있다. 전통적인 과외 과목인 음악ㆍ미술 학원과 입시학원에서부터 글짓기, 논술, 과학실험등 각종 학원이 150여개에 이른다.
학원들의 학생 유치전략도 유별나다.
‘최고의 강사진 확보’는 기본이고 학교가 방기한 ‘학생생활관리’까지도 맡는 학원들도 적지 않다. 모닝콜 서비스를 하고 있는 J학원은 새벽 6시면 전화로 학생들을 깨워 학원으로 불러 들이고 있고, I학원은 학부모들로부터‘학생지도를 위해 체벌을 해도 좋다’는 각서까지 받는다.
또 D학원은 학생이 한 달에 4번 지각하거나 2번 이상 무단 결석하면 제적 조치를 한다.이들 학원은 수강을 위해 3개월에서 1년 이상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1년치 수강신청이 모두 끝났다는 I학원의 김모(42) 원장은“학생 관리를 더 잘해달라고 학원 강사들에게 촌지를 내미는 학부모들까지 있다”고 귀띔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 유난히 많은 것도 대치동학원가의 특징이다. 이미 영어유치원과 어린이영어학원은 포화상태이고 최근에는 중국시대를 대비해 영어와 중국어를 함께 가르치는 유치원까지 등장했다.
승마 골프 등 고급 스포츠를 가르치는 학원도 성업 중이고 조기유학을 위한 초등학생유학준비학원도 붐을 이루고 있다.
초등학생 아이를 고급 스포츠학원에보내고 있는 주부 성모(34)씨는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해주고 싶은 것도 있지만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을 사귀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말했다. 대치동에 어린이철학학원 설립을 추진 중인 어린이철학연구소의 조근묵씨는 “강남지역 학부모들은 아이를 남들과 다르게 키우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색 학원에 대한 수요는 꾸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학원 열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립 청소년직업체험기관인 ‘하자센터’의 전효관 부소장은“직접 체험이 배제된 채, 주어진 학원교육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급변하는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김기철기자
kimin@hk.co.kr
■각계 전문가 제안
사교육 열풍과 학생 집중 현상에 대한 고발이나 개탄 보다는 이를 해결할대안 논의가 한층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각계 전문가들로부터 기형적 교육현실의 원인과 해법을 들어봤다.
▼윤인진(尹麟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 역시 자본집약적 활동이므로 집중 투자가 어려운 서민은 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고, 지역적ㆍ계층적 불평등이 심화된다.
지금처럼 강남만 계속 발전한다면 교육열을 지닌 학부모들이 어쩔 수 없이 강남으로 몰리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해 정부는 다른 지역에 교육ㆍ문화시설을 집중 투자하는 등 ‘사회정의’차원에서 직접 나서야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처럼 각 지역 특성에 맞는 명문고를 부활시켜 인재 충원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교 입시 경쟁이 심화되겠지만, 평준화 속에서 강남은 사교육 등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만의 수준높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왔고, 학생들도 질적으로 높은 조건에서 경쟁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평준화의 ‘게임의 법칙’은 깨졌다고 볼 수 있다.
▼남기범(南基範)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
강남ㆍ북의 격차는 사회의 다양성이 공간에 반영돼 나타나는'거주지분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력의 차이가 문화적 우열로 진행되고, 교육수준 격차와 교육자본 세습으로 인해 현재 계층구조가 고착화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해결책은 우선 교육정책이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획일(unification)에서 시민사회의 통합(integration)으로 변해야 한다. 평준화, 교육내용의 획일화와 규제, 대학입시 규제 등은 사교육 의존을 수반하며, 이는경제력이 학력과 동일하게 되어버리는 폐단을 낳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강도 높은 ‘강북살리기’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먼저 강남의 기반시설 유지에 쓰이던 예산을 강북의 생활환경개선 예산으로 전환해 교육ㆍ문화 인프라를 강화하여야 한다.
▼백순근(白淳根)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서열화 되고 중앙집중화된 인재선발 상황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하나의 ‘권력’이 됐다. 이에 맞춰 수준을 높인 입시학원과 일부 학부모를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지금의 교육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교육의 전문화ㆍ다양화ㆍ특성화 추구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교육부에 ‘구속’돼 있는 교육제도, 입시제도, 교과서, 교사양성제도, 교육평가 등을 교육청이나 대학에 주어 자율화의 폭을 확대해야 한다.
이와 함께 현 교육제도의 골간인 평준화 정책의 부분적 수정ㆍ보완이 병행되어야 한다. 평준화 정책은 많은 장점이 있지만 강남 현상에서볼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본인의 능력보다는 부모의 경제력에 학생의 학업능력이 좌우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현숙(劉賢淑) 한국교육개발원 인적자원연구실장
사교육의 번창은 교육투자의 사회적 수익률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에서 매우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가격이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형성된다는 논리로 볼 때, 소비자가 원하는 교육이 있는 곳에 높은 가격의 사교육이 범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현재의 공교육이 원하는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교육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공교육기관이나 교육내용, 프로그램을 다양화ㆍ특성화하고, 그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반짝 학원공부가 통하지 않는 대입제도 마련도 요구된다.
장기적으로는우리 사회가 단순 훈련에 의해 양성된 인재를 선발하는 체제에서 창의력과 사고를 겸비한 인재를 뽑는 체제로 전환해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채수연 한국교총 사무총장
강남 과열양상은 학교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평준화제도와 주입식 교육, 낙후된 공교육 등 복합적 요인의 산물이다.
평준화에 대한 보완이 절실하다는 이야기다. 여러 형태의 학교 설립을 확대해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학부모ㆍ학생들의 학교선택권을 보장해 그들의 교육욕구를 공교육 내로 흡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학교 내에서 대부분의 특기적성교육이 이뤄지고, 필요하다면 맞춤식 교육까지 가능하도록 교원 수를 확충하고 학교 시설을 질적으로 선진화해야 한다.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는 강남집중이나 사교육열을 막을 수 없다.
이와 함께 대입 제도의 다양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수능은 자격고사로만 하고 그 이외의 전형에 대한 세부사항은 대학 자율에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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