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지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 친구한테 부탁했습니다. ‘너희 집을 담보로 딱 1억 원만 꿔 달라’고. 그러자 녀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다. 그런데 딱 하나 조건이 있어. 내 아내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고.”초특급 문화상품 ‘난타’의 성공은 이 같은 두 친구의 눈물어린 우정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돈을 빌린 친구는 당시 전세 아파트에 살던 ‘난타’의 제작자 송승환(45) ㈜PMC프로덕션 공동대표.
1999년 8월 세계적인 공연축제인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참가비용 3억 원 중1억 원이 모자라 일어난 일이었다.
나머지 2억 원도 휘문고 동기동창으로 역시 PMC프로덕션 공동대표인 이광호(45)씨가 선뜻 대준 것이었다.
그리고 ‘난타’는 보란 듯이 그 곳에서 ‘30일 전회 매진’이라는 ‘대박’을 터뜨렸고 이후 지금까지 그 성가를 높이고 있다.
최근 2~3년 간 선보인 문화상품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송승환씨는 올해 무엇을 보여줄까. 또 어떤 대박을 터뜨릴까.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PMC프로덕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원래 PMC가 퍼포먼스(Performance),뮤지컬(Musical), 영화(Cinema)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이름값’을 해 볼 작정입니다.”
자신에 찬 첫 마디였다.
우선 퍼포먼스. 난타로 물꼬를 튼 비언어 퍼포먼스의 흐름은 8월 ‘UFO’가 이어받는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힙합, 탱고, 살사, 테크노 등 다양한 춤을 통해 그려내는 본격 비언어 퍼포먼스다.
“난타가 리듬과 비트를 위주로 했다면 ‘UFO’는 댄스와 서커스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지금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내년 8월 에딘버러 페스티벌에도 참가할 계획입니다.”
내년 1월 공연 예정인 뮤지컬은 틈새 시장을 공략하기로 했다.
10~20대가 뮤지컬, 40~60대가 마당놀이로 몰려간 만큼 갈 데 없는 30~40대를 파고들겠다는 것이다. TV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이나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오래 진행했던 향수 때문일까. “70~80년대 히트 가요와 팝송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뮤지컬을 만들고 싶습니다.”
극작가 이만희씨가 대본을 쓰고 있고, 연출자와 배우, 제목은 아직 미정이다.
영화는 ‘굳세어라 금순아’다. 6월 안으로 촬영을 시작해 이르면 연말쯤 개봉할 이 영화는 순진한 주부가 유흥가에서 헤매는 내용을 따뜻한 시각으로 그린 작품.
이시명 감독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 각색을 맡았던 현남섭씨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너무 일을 벌리는 게 아닐까. 5월에는 MBC 미니시리즈에도 출연키로 했다.
“그래서 96년에 ‘주식회사’ PMC프로덕션을 세운 겁니다. 주식회사 형태가 아니고는 일을 벌릴 수가 없지요. 간단히 말해 더 이상 친구에게 돈을 빌리기 싫어 주식회사를 차렸습니다. ‘난타’의 순이익은 재투자에 쓰고 그래서 ‘UFO’도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그의 말처럼 ㈜PMC프로덕션은 주먹구구식인 연극계에 비즈니스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자본금 2억 원으로 출발했지만 지난해에는 산은캐피탈, 일신창업투자사 등 기관투자가로부터 35억 원의 지분 출자를 끌어냈다.
지난해 매출액 72억원에 순이익 25억 원으로 어엿한 중견업체가 됐다. 10월 중으로 코스닥 시장에도 등록할 예정이다.
요즘은 속된 말로 ‘사필귀전(事必歸錢)’이다. 요즘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다.
“돈은 회사가 벌고 저는 월급을 받을 뿐이죠. 처음 4년 동안은 월급 한 푼 못 받다가 재작년에 월 200만 원, 지난 해부터 50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드라마 한 편 출연에 3,000만 원 정도 받으니까 월급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죠. 집은 일산에서 여전히 전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집값이 좀 비쌉니까?”
배우와 탤런트를 하면서 많이 벌었지만 집안에 풍파가 잦았고 연극제작에서도 재미를 못본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돈 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우리나라 연극과 뮤지컬, 그리고 영화가 살 길은 없을까.
그 역시 78년 서울 신촌의 극단76에서 단원생활을 시작으로 배고픈 연극계에서 20여 년을 버텨온 사람이 아닌가.
“어떤 문화상품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 연극은 너무 근시안적입니다. 100m달리기 같아요. 한두 주일 공연하다 다른 작품 하고…. 이래서야 무슨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오겠습니까. 저는 직원들에게 그럽니다. 마라톤을 뛰자고. 무대에 오를수록 점점 나아지는 작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진출하자고. 그래서 파란 눈의 관객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그런 공연을 선보이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액자를 가리켰다. 지난 해 9월 4일부터 2주간 미국 보스턴에서 공연할 당시 슈베르트 극장에서 발행한 팸플릿이다.
한 면에는 ‘난타’의 영어 제목인 ‘쿠킹(Cookin’), 다른 면에는 ‘난타’의 스태프와 출연진이 소개된 평범한 팸플릿이다.
“이 팸플릿이야말로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입니다. ‘플레이 빌’(미국 공연안내문)에 실렸다는 것은 미국 주류 연극계에 정식으로 편입했다는 증거입니다. 83~88년 미국 체류 시절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면서 이 ‘플레이 빌’을 부러운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결심했죠. ‘언젠가는 이 팸플릿에 내가 만든 연극, 내 이름을 올리자’고요. 이 팸플릿을 처음 받아 든 날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성공비결 4
송승환 ㈜PMC프로덕션 공동대표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이는 결국 ‘난타’의 성공요인인 셈인데 연극계 인사들의 분석을 토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시대조류를 읽었다.
‘난타’(1997년 10월 첫 공연)를 기획한 96년은 세계적으로 ‘탭덕스’나 ‘스텀프’ 같은 비언어 퍼포먼스가 태동할 무렵.
뮤지컬 ‘명성황후’의 연출자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는 “난타는 세계적으로 공연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비언어 퍼포먼스로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려는 연극계 흐름을 잘 탄 작품”이라고 지적했다.
둘째, 우리 것으로 승부했다.
송씨는 비언어 퍼포먼스에 사물 장단이라는 전통 가락과 리듬을 가미했다. 도마, 쓰레기통, 오븐 등을 두들기는 타악 행위는 탭 댄스를 위주로 한 ‘탭 덕스’와는 분명히 차별되는 매우 한국적인 브랜드였다.
셋째,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방송 출연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제작사 환 퍼포먼스(89~95년)와 PMC프로덕션(96년~현재)을 설립하는 등 늘 실험을 거듭했다.
연극평론가 김미도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안락한 생활을 박차고 험난한 연극판에 제작자로 뛰어든 송씨가 고맙기까지 하다”며 “특히 난타 전용극장 설립, 세계시장 적극 공략 등은 제작자로서 순발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평했다.
넷째, 좋은 측근이 있었다.
그의 곁에는 PMC프로덕션 설립 이후 내리 10억여 원을 말 없이 투자한 휘문고 동기동창 이광호(96년 당시 충남방적 전무) 공동대표가 있었다.
미국 뮤지컬의 아시아 시장 배급망을 꽉 틀어 잡고 있는 에이전시 ‘브로드웨이 아시아’도 ‘난타’의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 공연에 큰 힘이 됐다.
송승환씨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난타’ 보스턴 공연 팸플릿을 담은 액자가 놓여 있다. 가장 아끼는 물건이다.
■송승환은 누구
송승환씨는 1957년 서울 안암동에서 태어났다.
68년 KBS TV '똘똘이의 모험'으로 연예계에 데뷔해 TV('두자매''젊음의 행진'),라디오('밤을 잊은 그대에게''송승환의 문화읽기'),연극('에쿠우스''너에게 나를 보낸다'),영화('랏슈')를 종횡무진했다.82년 한국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94년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96년 공연제작사 (주)PMC프로덕션을 설립해 97년 "10월 '난타'를 처음 공연했다.미국 체류 중이었던 87년 88월 동갑내기 손톱미용사였던 박찬실씨와 결혼했으며 아이는 아직 없다.한국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했다.
/김관명기자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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