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도 몹시 추웠다. 날씨도 고르지 않아 빙판에 갇힌 새해 첫 출근길부터가 힘겨웠다.암울한 경제전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고, 세밑에 이뤄진 노동법 강행처리의 후유증도 심상치 않을 조짐을 보였다.
대통령 선거가 연말까지 1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레임덕 얘기가 은밀히 나돌았다. 5년 전 1997년은 그렇게 어수선하게 시작됐다.
일주일 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이 중계됐다.
대통령은 결연한 표정으로 국정과제를 적은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경제체질 개선, 부정부패 척결, 서민생활 안정… .
그러나 사람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았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정책목표란게 사실은 뒤집은 현실의 반영일 뿐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며칠 안돼 오랫동안 소문의 벽에 갇혀온 막연한 불안감의 원인이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한보의 부도와 함께 국가 상층부가 총체적으로 얽힌 거대한 비리가 터져 나왔다.
숱한 정치인과 고위관리, 은행장들이 오른 '리스트'가 곳곳에서 튀어 나오면서 나라 전체가 순식간에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야당은 연일 "총체적 부정부패"를 성토해댔고, 여당은 예의 "무책임한 정치공세" "정치적음모론"으로 맞받았다.
신문 칼럼란들은 "분노를 넘어 배신감을 느낀다" "정경유착의 고리, 이제는 정말 끊어야"하는 따위 비분강개조의 글들로 채워졌다.
의혹은 대통령의 최측근으로까지 거침없이 비화했다. 그러나 상황을 신속히 수습해야 할 검찰의 수사는 늘 그랬듯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대통령의 "성역없는 엄정한 수사" 언급은 그저 수사(修辭)로 들렸을 뿐, 설득력은 없었다. 그런 어지러운 와중에도 대권을 향한 정치인들의 행보는 꿋꿋하게 이어졌다.
물론 야권이야 당내의 이런저런 자잘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후보가 굳혀진 상태였지만, 여권에선 여러 중진들이 저마다 차기를 자임하고 나서면서 자못 혼돈스러운 형국이었다.
그렇게 1월이 다 가기도 전에 훗날 8룡(龍)이니, 9룡이니로 불리게 될 이들이 거의 다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에서 짜증섞인 질문이 나옴직 하다. 하필 지금 지난 일을, 그것도 기억하고 싶지않은 얘기들을 왜 이렇게 길게 늘어 놓느냐는.
그런 이들을 위해 더 이상의 지루한 상술(詳述)을 피하고 그 해 달력을 두, 세 장만더 넘겨가며 두드러지게 생각나는 것들만 짚어보자.
▲특검제 통한 한보 게이트 재수사 요구 제기 ▲민심쇄신을위한 전면 개각 ▲전 안기부 고위간부 특혜제공 등에 따른 수뢰 확인 ▲정치권 내각제 개헌 언급 ▲DJP 공조론 본격 대두 ▲한보 게이트 재수사 착수 ▲총무, 경제 등 청와대 전 수석비서관들 수뢰 및 대출압력 확인 ▲정치인들 수뢰 확인▲대통령 아들 구속 … .
자, 이제 그만하고 지금껏 회고한 내용에서 고유명사들을 지우고 피아간의 입장만 바꿔보자.
놀랍지 않은가. 심지어 대통령의 연두회견 주제까지 포함, 다섯해 전 이맘 때 일이 현재 상황과 어쩌면 이토록 빼 닮았는지.
그리고 새삼 허망하지 않은가. 우리가 지난 5년 동안 그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면서도 앞으로 단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시 학자나 사회 원로들이 지적한 사태의 근본 원인은 대개 두 가지로 요약됐다.
법치(法治)를 넘어선 인치(人治), 그리고 이전 정권(TK)을 무색케하는 지역(PK)정권 구축이 그 것. 현 상황의 분석 역시 이와 한 자도 다르지 않다. 역사는 끊임없이 해답을 주어왔으나 아무도 그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5년 뒤, 과연 우리는 어디쯤에 서 있게 될까.
이준희 기획취재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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