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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왜 점을 보러 갈까

입력
2002.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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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기획사 ‘문화아이콘’ 대표 정유란(27)씨는 ‘점 마니아’다.연초에는 대개운수를 보고 기분이 우울할 때도 점을 보러 간다. 혼자 주역책도 읽고 요즘 유행하는 타로카드 점술도 배웠다.

서울 신촌이나 미아리에 자주 다니던 그는 요즘 강남이나 인터넷사이트를 기웃거린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뒷편은 1998년경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점술카페가 현재 25여 개가 넘어 ‘점술밸리’로까지 불린다.

서울 곳곳에 4개의 지점을 둔 ‘프랜차이즈’형 점집도 있다. 깔끔한 카페형 인테리어와 다양한 이벤트가 신세대 여성들을 잡아 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일본와세다 대학,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 역술인들이 영어를 섞어가며 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복채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보통 3만~5만원하는 일반 역술원과는 달리 카페형점집에서는 1만~1만5,000원이면 차 한 잔과 함께 점을 볼 수 있다.

웬만한 인터넷 점술사이트에서는 사주는 1,200원, 토정비결은1,500원, 궁합은 700원이면 가능하다.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점 열풍은 인터넷이 진원지다. 산수도인(www.fortune8282. com), 사주닷컴(www. sazoo. com) 등 이름을 꼽을 수 있는 점술 사이트만도 100여 개가 넘는다.

▼여자고객이 70~80%

압구정동 ‘사주테라스’ 의 역술인 성 연씨는 “여자 고객이 70~80%다. 남자 고객은 여자 친구손에 이끌려 오는 경우가 대부분” 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녹현철학원’ 이세진 원장도 “다른 철학관에 비해 여자가 적은 편인데도 60%는 넘는다”고 한다.

요즘 점 집의 특징은 고학력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이다. 명문대 법과대학을 나와 사법고시와 유학을 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김 모(30)씨, 수억 원을 주무르는 펀드매니저 윤 모(29)씨는 역술원 단골 여성 고객이다.

남편이 자신을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생각하는 것 같아 괴롭다는 여의사들이나 여성 전문직들도 자주 찾는다고 한다.

김병후 신경정신과 원장은 “여성들은 감성적인 뇌가 발달해 있다.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매사에 불안이 많은 데다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점에 대한 태도는 어머니 세대와는확연히 다르다. 결과를 맹신하기보다는 마음 편한대로 골라서 받아들인다.

정유란씨는 “같은 집에서 점을봤는데 한번은 ‘현모양처 팔자’라더니 다음에는 ‘사업 운이 좋다’고 했다. 나중 말을 믿고 산다”고 말했다.

젊은 여성들이 점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정보다.

여기저기 정보는 흘러 넘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점술왕국 송병창 원장은 “점은 일종의 일기예보와 같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나를 정확히 알고 1%의 성공 가능성이라도 건져 보려는 심리”라고 말한다.

전에 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일들이 많아진 여성들이 결정의 일부를 점에 맡김으로써 부담과 두려움을 줄여보려는 심리도 있다.

신세대 역술인들은 ‘도인’ 대신 ‘라이프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내민다.

여성들이 상담을 통한 치유 기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세진씨는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고 그 자체로 위안을 얻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역술인들이 보는 요즘 여자들

점 보러 오는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남자’다.

인터넷 점술사이트 ‘사주닷컴’에 따르면 배우자 및 이성문제가 32.8%로 1위다. 하지만 칼자루는 분명 여자들에게 넘어갔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할까요’ 라고 묻는 대신 서너 명의 남자 사주를 들고 와 ‘어떤 남자가 내운세를 펴는 데 도움이 될까요’라고 묻는다.

일일이 사람을 사귀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미리 맞는 남자를 골라 사귀겠다는 심산이다. 한 여성은 여러 남자 중 ‘마음이 맞는 남자’ 대신 ‘관운과 재물운이 있는 남자’를 골랐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끝내겠다.”

그렇지만 ‘취직 대신 결혼이나 하겠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직업에 대한 성취 욕구도 대단하다.

도화살이나 역마살 같은,과거에는 팔자 센 여자의 상징이었던 운세들도 직업 선택에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미술대를 나온 30대 이혼녀는 ‘도화살’ 을 받아들여 방송계로 진출했다고 한다. 점술왕국 압구정 지점에서는 상담의 40%가 ‘성형’에 관련된 내용이다.

주로 취직에 애를 먹는 여성들이 코를 높이거나 턱을 깎는 등 얼굴을 바꿔서라도 진로를 개척하려는 의지다.

그렇다고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송병창 원장은 “바뀐다면 그것은 자신감이 붙어서일 것”이라고말한다.

기혼 여성들 중 상당수는 불륜을 거리낌없이 털어놓는다. 주요 관심사는 ‘어떤 남자가 좋을까’와 ‘어떻게 하면 안 들킬까’.

한 역술인은 “경제난때문인지 최근 1, 2년은 좀 덜해졌지만 그전만 해도 기혼 여성이 40%에 달했다”고 말한다.

그는 “남편 사주 밑에 또 남자 사주를 적어내는 손님도 있다”고 말했다.

“요즘 여자들 대단하다.” “21세기는 확실히 여성의 시대인 것 같다.” 역술인들은 하나같이 훌쩍 커진 우먼파워를 실감한다고 했다.

분명 ‘센 여자들’이 많아지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속내도 드러내지못했던 여성들이 유독 역술인들에게는 솔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양은경기자

key@hk.co.kr

■타로카드…수정구…신세대 점술도구 인기

로데오거리의 점집에는 캐릭터숍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깜찍하고 앙증맞은 점술도구들이 널려 있다.요즘 가장 많인 찾는 것은 타로카드이다.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집시들이 유럽을 떠돌며 전파했다는 이 카드에는 태양과 여신상,사람들이 상징적인 형태로 조합되어 있다.인생의 큰 흐름을 점치는 22장의 카드와 작은 일들을 맞추는 56장의 카드를 섞어 3~12장을 뽑아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그림만 해도 수백여종의 변종이 있고 뽑거나 해석하는 방법도 역술인에 따라 다양하다.주로 사주의 보조 도구로 쓰이는 동양의 육효처럼,점성술의 보조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그림의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재미가 마치 만화 같은 느낌이다.

숫자를 이용하는 동전점이나 주사위점도 인기다.주사위의 경우 6~12면체의 주사위 두세 개를 던져 나열된 숫자들을 그 고유 의미에 따라 해석한다.점술에서 보는 숫자의 의미는 때로 통상적인 인식을 벗어난다.동양권에서는 불길한 숫자로 알려진'4'의 경우 서양에서는 안정적이지만 변화가 없어 다소 지루하다는 뜻이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영매 오다매(우피골드버그)가 쓰던 수정구도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구슬점(일명 수정구점)은 숫자나 그림 같은 매개체 없이 점 치는 사람의 영감에 의존한다.기를 증폭시키는 물질로 알려진 수정구를 쓰다듬으며 퍼뜩 떠오르는 영상을 이야기해준다.한 역술인은 "고도의 교감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대로 칠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라고 한다.

"점은 그야말로 점이다.고대 중국에서 거북이등 갈라지는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 글자의 기원설처럼 우연성이 크게 작용한다."사주테라스 성 연씨느 점은 역술에 비해 보는 사람의 직관에 의존하는 비율이 크다고 강조한다.생년월일이나 생김새 같은 개인정보가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정확도는 다소 떨어지고 재미가 두드러진다.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역술과 더불어 점을즐겨 찾느다.이 세상에서 우연과 직관이 차지하는 몫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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