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두고 온 시’(창작과비평사발행)에서 시인 고 은(69)씨의 시선은 뒤로 향한다.지나간 것들, 잊혀진 것들, 과거에 속한 것들이 생각난 시인은 돌아서서 왔던 길을 바라본다.
그때 ‘등뼈까지 젖게 했던 눈물과 구두 밑창까지 달라붙던 고뇌’가 있었는데, 지금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지난날 얻어 마시는 술에 아첨한다는 것이/ 도리어 욕설을 퍼부어대고 마는 만취의/ 그 막막하던 순정의 시절도 사라졌다//지난날 30년/ 독재 그것이 내 생존의 개펄 같은 애욕이었을 줄이야/ 희망이었을 줄이야’(‘최근의 고백’ 부분).
시인은 치열했던 날이 그립다. 그때는 춥고 가파른 시대였지만 서로의 온기로 따뜻했다.
이데올로기가 끝나고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가 혼자서 컴퓨터와 노닥거리느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골이 깊고 넓어졌다.
얼마나 옛날이 그립던지 어느 날 밤에는 누군가 뛰쳐나와 소리치는 것을 듣는다.
‘아 독재가 있어야겠다/ 쿠데타가 있어야겠다/ 그래야 우리 무덤 속 백골들/ 분노의동정(童貞)으로 뛰쳐나오리라’(‘광장 이후’ 부분).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살았던 사람이 더 이상 절망도 희망도 없는 날을 살아야 하는 것은 끔찍한 형벌이다.
‘난곡동 빈민굴 노정혜수네한테 가지 않는다/ 네팔 노동자 공장에도 가지 않는다/요즘의 나/ 넥타이가 너무 많다/ 70년대 이래의 그 낱말을 가만히 써본다 ‘민중’’(‘작은노래’ 부분).
지금의 가벼운 세상은 오히려 생명을 위협한다. 인생의 발걸음을 무겁고 깊게 할 정신의 모래주머니를 어디서 구해야 할까.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가면 가까스로 살아남고/ 그냥 내려간다면/ 바람에 날려/ 저 비탈 아래 굴러가리라 가벼움은 죽음이다’(‘향로봉’ 부분).
온 길을 되짚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두고 온 듯/ 머물던 자리를 어서어서 털고 일어선다/ 물안개 걷히는 서해안 태안반도 끄트머리쯤인가’(‘두고온 시’ 부분).
자신이 선 자리를 문득 가늠하니 어느 봄날이다. 시인이 뒤를 돌아보면서 한참을 서 있던 그 순간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삶이란 누누이 어느 죽음의 다음이라고/ 말할 나위도 없이/ 지상에 더 많은 죄지어야겠다 봄날은 간다.’(‘봄날은 간다’ 부분).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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