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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산책] 혼란의 1회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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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산책] 혼란의 1회 월드컵

입력
2002.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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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7월13일 프랑스_멕시코의 개막전으로 드디어 역사적인 제1회 월드컵대회가 시작됐다. 프랑스가 첫 경기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것은 월드컵을 성사시킨 줄 리메 회장의 조국,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프랑스는 골키퍼가 10분만에 턱뼈 골절로 실려 나간 뒤 10명이 싸운 멕시코를 4_1로 이겨 월드컵 첫 승리를 기록했다. 당시는 선수 교체가 없던 시기였기때문에 멕시코는 필드플레이어가 골키퍼를 보아야 했다.

13개국이 참가한 첫 월드컵은 4개조 1위가 준결승, 결승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첫 대회인만큼 혼란이 잇따랐다. 남미와 유럽의 경기규칙이 맞지 않아 대회중 긴급 협의회가 열리고, 심판이 관중들에게 쫓겨 가는일도 일어 났다.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는 주심이 6분을 남겨놓고 종료 휘슬을 불어 경기가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일도 있었다. 아르헨티나에게 1_6으로 진 미국의 콜 감독은 “심판에게 휘슬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판문제가 부각됐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대망의 결승전에서는 전반 아르헨티나 공을, 후반 우루과이제 공을 각각 사용했다. 이때 결정방법은 동전을 사용했는 데 축구에선 추첨이나 진영을 결정할 때 지금까지도 이 방법을 쓰고 있다. 또 축구공은 나라마다 다른 데다 공인구 제도가 없어 1962년 칠레대회 때까지 계속 문제가 됐다.

결승서 우루과이에 2_4로 패한 아르헨티나 신문은 상대의 거친 플레이와 편파판정에 졌다고 보도했다. 우루과이 영사관 앞에는 아르헨티나 팬 수천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결국 우루과이 국민도 분노했고 양국은 국교를 6년동안이나 단절했다.

비록 프랑스의 개막전에는 관중이 1,000여명에 그쳤지만 첫 월드컵은 총55만명이 입장, 25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월드컵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심판의 불미스런 판정과 각국의 이기주의가 지배했고 이러한 행태는지금까지도 전통처럼 계속되고 있다. 우루과이가 유럽국가들의 대거 불참에 항의, 1950년까지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하는 사례이다.

유승근 기자

u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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