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사가였던 운현궁에 얼마 전까지 찻집이 하나 있었다.고택 안에 앉아 수정과나 솔잎차를 마시는 맛이 좋아 가끔 찾아갔었다.
며칠 전에 갔더니 찻집은 없어지고 툇마루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만 놓여있었다. 안에서는 여인 몇 명이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신발을 벗고 툇마루에 올라 사연을 물었더니, 무슨 행사가 있어 뒤풀이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때 갑자기 마당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몰상식한 사람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욕을 먹는단 말야. 들어가지 말라면 그걸 지켜야지."
뜰을 거닐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 모두 소리지른 사람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해프닝의 핵심은 시비, 즉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시비란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이 없다.
누구의 기준인가가 중요하다. 시비의 기준은 세상과 개인에 대한 전제와 가정에 따라 달라진다.
소리를 지른 사람의 가정은 이렇다. "한국 사람은 공중질서의식이 없다. 제멋대로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열등한 민족이다. 가차없이 꾸짖어야 한다. 이것이 정의다. 나는 정의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유감스럽게 그 사람은 그때 운현궁의 뜰을 걷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공중질서의식이 결여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초라하고 야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시종 고함치고 험한 말을 씀으로써 조용한 고택의 뜰 안에서 고운 오후 한때를 즐기려는 모든 사람들의 짧은 산책을 망쳐 놓았다.
그의 정의가 산책자들의 조용한 행복을 죽이고 있었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들이 모여 한 개인의 개인사가 이루어진다.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개인적 이유와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은 숨이 막힌다. 행복해 질 수 없다.
창조적인 조직,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진작시키고 격려하는 몇 가지 정신적 가정과 전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 역시 나만큼 옳을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시장경제의 번영은 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시장경제는 신뢰를 소모하는 메커니즘이지 신뢰를 만들어 내는 체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둘째는 전통과 권위가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는 각성이다. 미래는 늘 새 옷을 입고 나타난다.
과거는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아니다. 지나온 가치 있는 것들을 존중하고 보존하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중요하다.
진취적인 사회와 조직의 지도층은 자신들이 결국 가장 보수적인 집단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미래에 속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조직의 비전 속에 집어 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전략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셋째, 새로운 시도를 가치 있게 생각하고 실패에 대하여 관대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복지부동은 가장 비열한 처세술이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며 실험 단계로 간주된다.
창의력은 창조적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 괴짜를 용인하고 배양하는 정신적 환경 속에서만 창의적 사회는 가능한 현실이 된다.
먼저 세상을 '가능성의 장(場)'으로 가정하자. 그리고 가장 나다운 일을 찾아보자. 또한 다른 사람이 가장 그다운 일을 하도록 도와주자.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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