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사태의 주범은 정부의 눈 먼 돈입니다.” 국내의 한 벤처기업인은 각종 게이트와 윤태식씨의 패스21 사태 등 벤처기업을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보며 이렇게 정리했다.정보통신부, 중소기업청 등 정부에서 시행하는 각종 벤처기업 육성책은 기술력은있으나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기업을 살리기 위해 1998년부터 지원자금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의 벤처지원육성책이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가장 큰 문제로 벤처기업 육성을 정부가 주도한다는 점을 꼽았다. 정부주도아래 온갖 지원금이 움직이다보니 벤처기업들은 기술력과 아이디어로 시장에서 승부하기 보다는 정부의 실권자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는 왜곡된 시각이굳어져 각종 비리가 싹틀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자꾸만 늘어나는 벤처지원자금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1998년부터 벤처기업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정부의 벤처지원자금은 현재 12개 부처에 걸쳐 100개가 넘는다.
2000년에 중소기업청이 4조원의 예산을 벤처지원자금으로 배정한 것을 시작으로지난해에는 벤처기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국방부마저 394억원의 방산업체 지원자금 가운데 80억원을 중소벤처에 할당했으며 한국전력도 223억을 벤처기업에지원했다. 한국수출입은행도 남북경협을 추진하는 벤처기업들을 위한 남북경협자금을 마련했다.
이들 자금은 1998년 5월에 정부에서 제정한 벤처기업 육성특별조치법에 따라벤처기업으로 지정되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업계에는 벤처기업으로 지정받고 기금 한두개조차 지원받지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까지돌았다.
결국 일부 벤처기업들은 기술개발 등으로 자생력을 키우기보다는 엉뚱한 머니게임으로돈벌이에만 혈안이 됐다. 벤처인증을 받기 위해 벤처캐피털의 자금을끌어들여 그럴 듯 하게 포장한 뒤 정부의 정책자금을 받아 코스닥 등록까지 마치면 손쉽게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데 굳이 어렵게 기술개발을 할 필요가없다는 인식이 한동안 업계에 팽배했다. 한국디지털라인의 정현준씨와 MCI코리아의 진승현씨, 패스21의 윤태식씨 등이 결국 이 같은 길을 걸은 대표적인사례다.
전문가들은 국내의 벤처정책이 자리를 잡으려면 정부가 기업에 대한 직접 지원보다는시장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희대 국제경영학부의 김한원교수는 지난해 국회 중소벤처기업포럼이 마련한 정책토론회에서 “벤처기업에대한 정부의 직접 지원은 기업의 자생적 발전을 저해하고 양적인 성장만 가져온다”며 “벤처기업에 대한정부 지원이 과도할수록 기술개발 및 경영혁신보다는 코스닥등록 및 증자를 통해 자본이득을 우선시하는 도덕적 해이를 수반한다”고꼬집었다.
김교수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려면 “정부는 정책자금조성을 통한 융자위주의 지원에서 민간부문이 감당하기 어려운 첨단기술과 창업초기의 벤처육성에 우선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産銀 비리로 본 문제점
"예고된 비리였다."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의 벤처비리가 검찰 수사에서 속속 드러나면서 1998년부터 확대일로를 걸어 온 은행권의 벤처 투자가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은행들의 벤처 투자는이미 시작부터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벤처투자 실태
벤처 투자의 선봉에선 것은 이번에 문제가 된 산업은행. ‘벤처붐’이 일기 시작한 98년28개 업체에 231억원을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99년 571억원(53개 업체), 2000년 1,270억원(133개 업체), 2001년 861억원(101개업체) 등 투자 규모를 계속 키워나갔다.
이미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2,933억원)에 거의 육박하는 2,368억원의 실현이익을 올릴 만큼 높은수익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국책은행인 기업은행 역시 98년 2억원에 불과하던 투자 금액이 지난해에는 311억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들을 포함해 은행권 전체로 9개 국책ㆍ시중은행의 벤처 투자 규모는 98년243억원, 99년 990억원에 불과하다 2000년 3,095억원, 2001년 4,160억원으로 급증세를 보였다.
▼벤처투자의 구조적 한계
벤처기업들이은행권에 투자 지원 요청을 위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산업은행의 벤처 비리 사건이 터졌던 2000년초부터. “벤처캐피털의 영역에 은행권이 99년말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대박’을 꿈꾸는 벤처기업주들의 발길이 쇄도했다”는 것이 모 은행 투자경영지원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문제는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넘쳐났고 벤처 투자의 경우 일반 기업대출과 달리 심사기준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점. A은행의 경우 연간 600건 가량의 신청 중 실제 심사를 통해 투자로 이어진 것은 4~5%에 불과했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심사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졌다 하더라도 수요가넘치는 상황에서는 뇌물 등 비리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며 “게다가 비전문가인 은행 직원들이 벤처 기업의 신기술 사업계획서만 보고 옥석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향후 과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국책은행을 필두로 은행들이 무작정 벤처 투자를확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높다. “정부의 벤처 육성책에따른 것이고 시스템 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은행들의 항변에도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안목을 도외시하고 수익성에만 너무 집착한 결과라고 꼬집는다.
이에 따라 은행들의 벤처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평가 시스템과철저한 감시체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지금까지 각종 비리 사건에서 보아왔듯 벤처기업은 위험이 큰 만큼 비리가 개입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곳”이라며 “이 때문에 은행의 벤처 투자에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평가 시스템, 이에 대한 은행 내부와 금융당국의 철저한 감시 등이 반드시 전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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