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부터 정계 한 모퉁이에서 일기 시작한 개헌론이 새해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다.개혁성을 자임하는 여야 정치인들이 내놓고 있는 개헌론의 골자는 대통령의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다.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 임기가 서로 어긋나 전국 규모의 선거를 자주 치르게 된다는 것, 단임 대통령의 레임덕이 너무 이르게 온다는 것, 부통령제를 두면 권력의 분산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등이 개헌론의 근거다.
그러나 이 근거들은 그리 튼실해 보이지 않는다.
우선 선거를 자주 치르게 된다는 것이 개헌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과정이다.
선거를 통해서 정부나 정당의 정책은 시민의 검증을 받는다. 정치과정으로서의 선거가 사회의 다른 분야에 부담을 줄 때, 중요한 것은 선거가 합리적으로 치러질 수 있는 정치문화를 가꾸는 것이지 선거일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레임덕 문제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중임 대통령에게도 레임덕은 오게 마련이다. 게다가 중임을 노리는 대통령은 단임 대통령보다 자신의 정책을 선거의 논리에 종속시키고 싶은 유혹에 오히려 더 쉽게 노출된다.
다시 말해 개헌론의 근거 가운데 하나인 대통령의 '제왕적' 행태(민주당 김근태 의원의 말)는 중임제 아래서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잦은 레임덕보다 민주주의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현행 헌법 아래서도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총리에게 권력을 나누어줄 수 있다.
부통령제를 신설해도, 대통령의 권력 독점 욕구가 강하면 부통령은 허수아비가 되고 만다.
개헌론의 근거인 레임덕방지와 권력분산은 서로 모순적이기도 하다.
개헌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개헌을 통해 권력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은 정당 개혁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애국 차원의 개혁 과제"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허풍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 시스템은 극히 정상적이다. 정부 수립 이래 지금만큼 권력 시스템이 정상적인적은 없었다.
그리고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꼭 헌법에 손을 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헌법을 그대로 두고도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해야 할 법률적 개혁(예컨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의 여지는 매우 크다.
역시 개헌론자인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은 "세번에 걸친 5년 단임제 기간 중 IMF 사태와 지역주의 심화 등 단임의 폐해를 톡톡히 경험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환란(換亂)과 지역주의를 단임제와 연결시키는 이의원의 기발한 상상력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의원은 현행 헌법의 역사적 의미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헌법은 이 의원 자신이 재야인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열매다. 이 헌법이 시행된지 15년이 돼 간다.
만신창이의 대한민국 헌법사에서 최고의 수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헌정사에 익숙한 정치인들의 감각으로는 15년이 헌법에 싫증을 내기에 충분한 기간일지 모르나, 역사적 감각으로 보면 민주주의가 깊이 뿌리내리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의 유아다. 이 정도의 합리성을 지닌 헌법을 이 정도의 기간 동안이나마 운영해본 경험도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다.
언젠가는 헌법을 고쳐야 할 날이 오기야 하겠지만, 지금 이 헌법 아래서도 할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지역주의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크게 져야 할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이부영 의원은 헌법을 탓하기 전에 민주당 노무현 의원의 반만큼이라도 지역주의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다.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당론으로 내세웠던 민주당의 정동영 의원이 '근본적애국'을 실천하는 길은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만큼이라도 보안법 개폐 운동에 발벗고 나서는 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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