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귀 기울이면첫눈 내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하얀새 달력 위에
그리고내 마음 위에
바다 내음 풍겨오는
푸른잉크를 찍어
‘희망’이라고 씁니다
이메일 ‘받은 편지함’에서<이해인 수녀-새해 첫 날의 소망> 을 뒤늦게 찾아 읽는다. 눈길을 붙잡는 말은 단연 ‘희망’이다. 이해인>
2002년은 나에게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 아니, 우리 사회는 이미 시작된 이 새해를 어떻게 맞이했던가.
그곳에 혹시 희망이 있는가.
선거의 해를 맞이한 정당이 ‘혁명적’인 쇄신안을 쫓기듯 마련하는 것을 보면서, 병들어 위기에 처한 우리 민주주의에 한 줄기 소생의 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새해가 준 작은 희망이다.
건강한 정당, 좋은 정치에 이로써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비록 늦고 게을렀다고는 하더라도, 이 민주주의 실험은 이제 다시는 깨져서는 안될 소중한 꿈이다.
넘어지고 더러 피흘리고 뒹굴면서, 그렇게 민주주의라는 눈덩어리는 커가는 것이다.
그러나 푸른 잉크로 ‘희망’을 쓰기 전에, 새 달력은 이미 검은 먹물로 어지럽혀진 절망의 일지(日誌)인지 모른다.
어른들만의 체질이 아니라 아이들의 DNA까지도 물들인 ‘부패 불감(不感)’이 그 첫째다.
우리의 10대 소년들이 ‘뇌물로 써서 해결되는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부패하겠으며’, ’10억원을 번다면 10년 감옥살이를 마다않겠다’는 데에 상당수(각 28, 16%)가 동의했다는 중ㆍ고교생 부패의식 조사보고서 위에, 공사비 떼어먹기식 부정부패행렬에 ‘당연한 듯이’ 동참하고 있는 교장선생님들의 얼굴이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발족을 앞둔 부패방지기구의 위원장 내정자가 ‘내정자’의 지위조차 사퇴해야 했던 사태는 차라리 우리들의 눈을 감고 싶게 만드는 질낮은 시트콤이다.
이제 누가 더 있어, 누구를 탓하랴.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2002년을 ‘희망’으로, 또는 ‘절망’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정말로 걱정하지 않으면 안될 긴급한 일이 여기 있다.
미국, 또는 부시의 자신감 넘치는 언행이 드러내는 ‘일방적 군사주의’의 위협이다.
부시는 새해를 ‘전쟁의 해’로 선포했다. “세계 어디서라도” 테러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산채로든, 죽은 채로든” 반드시 잡아야 했던 빈 라덴을 좇는 데 아직 성과가 없다고 보는 부시는, 지금 어떤 방법으로든 전쟁의 확대로 그 채워지지 않은 부분들을 메우려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 전쟁이 이슬람 아랍에 대한 증오와 보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이슬람 권의 미국에 대한 적대나 반미감정의 확산은 부시로서도 지기 싫은 짐이다.
바로이 점에서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우리에게 절체절명 위기가 있다고, 그 1% 가능성을 막는데 우리민족의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고 다급하게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는 부시의 ‘다음 타깃’이 북한이 될 수 있다는, 생각하기에도 무서운 추리에 근거한 것이다.
북한은 ‘불량국가’이고, ‘김정일은 믿지 못할 사람’이며, 핵무기 개발, 생화학 무기, 미사일 수출국, 테러리스트 훈련 등의 온갖 불투명한 의혹으로 점철된 부시 행정부의 ‘북한 이미지’로 미뤄, ‘전쟁의 해’로 선포된 올해의 예정된 전쟁시나리오가 과연 한반도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갈수 있을 것인가.
한원로의 경고와 예언에 귀기울이는 2002년의 시작은 불안하고, 원형질로 굳어버린 부패는 절망이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희망’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assisi6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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