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차이잉원(蔡英文) 주임위원(장관)은 지난 해 기업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기업들이 조국을 배신하고 있다”며 목청을 돋웠다. 그는 “가지는대륙으로 뻗더라도 뿌리는 대만 본토에 남겨야 하는데 아예 뿌리까지 파내 가려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기업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 마디로 “장사꾼에게 조국은 없다”는 것. 타이페이 신주(新竹)과학단지에서 마더보드 생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한 기업인은 “뿌리가 자라려면 토양이 좋아야 하는데 정부는 아무런 양분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오히려 정부를 공박했다.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만 해도 경제의 모범생으로 통하던 대만 경제가 이른바 ‘중국다헤이뚱(大黑洞ㆍ대블랙홀)’ 앞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위안블록을 향한 기업과 자본의 대륙러시로 산업ㆍ자본 공동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대만 정부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자본가들의 마음마저 떠나고 있는 형국이다.
대만 경제위기의 단면은 실업사태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타이페이 시내에서7년째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는 쉬차이웨이(許再輝ㆍ37)씨는 “하루 일당 2,000위엔을 벌기 위해 1, 2년 전에는8시간이면 됐지만, 지금은 14시간을 꼬박 운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실업을 흡수하기 위해 대만 정부가 지난 해 두 차례에 걸쳐 택시면허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그 결과 타이페이 시내의 경우 영업용 택시가 두 배 가까이 폭증했기 때문이다.그는 “경기 때문에 손님이 없는데 택시마저 늘어나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고 푸념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2%대에서 안정됐던 대만 실업률은 올해 초 3.66%로 출발한 뒤 분기마다 앞자릿 수를 갈아치우며 1년새 2배 가까이(10월 현재 5.33%) 뛰어올랐다.
컴퓨터 부품 중견기업인 엘리트그룹의 리유다웨이(劉達威) 부사장은 “대만경제는 현재 한국의 IMF 사태와 똑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며 “하지만 정부는 아무런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업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불황과 대륙이전에 따른 공장들의 휴ㆍ폐업이다. 대만경제부에 따르면 올들어 9월까지 공장 도산(휴ㆍ폐업)은 전년 비 16%가 늘었고, 신규등록도 34%가 격감했다. 타이페이 시내 임대사무실 공치율(공실률)도 10.62%로 6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임대료도 전년비 6.18%가 하락했다.
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대만 기업의 중국 진출은 약 4만개. 하지만 민간 연구기관 등은 대만정부의 투자규제를 피해 홍콩 등 제3국을 통해 우회 진출한 기업까지 포함하면 최소 7만~8만개, 투자금액도 1,000억 달러(정부 400억 달러)에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의 비메모리반도체 업체이자 대만 간판 기업인 TSMC 모리스 창 회장이 “시장이있는 곳에 공장을 짓겠다”며 대륙진출 의지를 천명하고 나섰고, 화교기업의 대표주자 가운데 하나인 포모사그룹도 중국 베이징등 3곳에 1만1,000 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을 짓겠다고 나섰다.
포모사 왕융칭(王永慶) 회장은 정부가 60억 달러 규모의 대륙 발전사업 투자계획을 불허하고 있지만, 이를 강행할뜻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자본 역시 대만을 외면하고 있다. 대만에서 컴퓨터 부품 등 연간 50억 달러어치를 구입하는 IBM사는 최근 대만 현지 물자구매센터 설립 계획을 중국 심천으로 선회했다. 지난 해 말 대만 입법원 선거에서 ‘대만독립’을 내 건 집권 민진당이 압승을 거둠에 따라 양안 긴장이 심화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대만 경제부 투자심의회 집계 결과 지난 해 10월까지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액은 42억7,000만 달러로 전년비 30% 격감했고,같은 기간 국내자본의 대중국 투자는 23억 2,000만 달러로 15.6%가 증가했다.
대만 행정원은 급기야 지난 해 11월 이등휘 전총통 시절이후 대륙정책의 근간인‘계급용인(戒急用忍ㆍ지에지용런)’, 즉 대륙과의 교류를 서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후퇴, 올해부터 대만 기업의 중국 직접투자 상한선(5,000만 달러)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그 대신 정부가 투자계획서 심의를 해 투자 승인 여부를 결정, 핵심 고부가가치 분야만 묶어두겠다는 계산이다. 대만 경제부 국제무역국 웨이아이밍(魏可銘) 부국장(차관보)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유일 뿐 그 우유가 어느 나라에서 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공동화와 관련 “값싼 흑인 노동력을 노린 영국 자본의 미국러시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아직 건재하다”며 “대만의산업공동화도 국제 분업체제 개편을 위한 일시적인 충격일 뿐 대만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변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차이잉원 주임위원의 푸념처럼 현실과 전망은 대만 정부의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한 기업인은 “중국에 투자해 돈을벌면 중국에서 소득세(매출의 33%)를 내고, 대만으로 송금하면서 송금분의 25%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며“누가 현지 투자 과실을 본국에 송금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양안간 ‘3통(通郵, 通航, 通行) 금지’로 투자나 수출이 3국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고, 투자협정및 이중과세방지 협정조차 맺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동아연구소 웨이아이 소장은 “중국 경제가 급팽창하면서 아세안(ASEAN)을 비롯한 중화경제권 전체가 단일 블록을 구체화하고 있지만 대만은 정치적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있다”며 “3통, 특히 경제적으로 가장 시급한 통항의 경우 현 정치여건상 조기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경제가 회복돼 2003년 이후 경기가 나아진다고 하지만 대만 정치가 중국을 외면하는 한 본격적인 경제회복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단언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신흥.지식산업 키우겠다"
대만의 정보기술(IT) 등 기술집약 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55.8%. 반도체 단일 품목만도 34.5%에 이르고, 미국시장 의존도는 23%에 달한다.
대만 경제부스옌샹 공업국장(차관)은 “한국은 내수시장이 크고, IT편중도가 낮아 외풍을 덜받고 있지만 대만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대만정부는 지난 해 11월 산업ㆍ자본 공동화(空洞化)와 산업 편중을 극복하기 위해 ‘8대 신흥산업 육성전략’을 발표했다. 반도체 설계 및 정밀설비, 생물화학산업, 신소재, 설계ㆍ전문 서비스산업 등을 주력산업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또 디지털미디어 지식성을 신설, 인터넷과 디지털콘텐츠 산업 투자를 촉진하고, 5대 지식산업(정밀설계, 인터넷, 무선통신, 생화학, 의약)을 중점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이 같은 대만 정부의 신산업 전략이 실효를 거두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 관계자는 “대만정부가 지난 해 초 내수 진작 등을 위해 8,100억 위엔을 풀겠다고 발표했지만 야당의 반발과 여당내 알력으로 사실상집행된 게 없다”고 말했다.
대만 주계처가 제조업자 1,024명을 대상으로조사한 결과 올해 고정투자 총액은 전년비 35.1%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중소기업주력(전체 기업의 98%)의 대만 경제가 특유의 변신력과 적응력으로 전환기에 적응할 수 있을까. 삼성물산 현지 지사장인 유홍렬(柳弘烈) 총경리는 “중국의화남ㆍ화동 경제권의 성격이 다르듯이 대만 경제 역시 거대 중화경제권의 독자적인 한 축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만 국립정치대학의 웨이아이 교수는 “국내정치 안정과 양안관계 개선이 전제되지 않는 한한계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