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비치는 국무회의 장면은 매번 똑같다. 대통령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국무위원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받아 적는다.국무회의 뿐 아니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마치 선생님이 불러주는 낱말을 철자법에 맞게 쓰는가를 측정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생들의 받아쓰기 모습을 연상시킨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길래 저렇게 열심히 적을까.
■오래 전 법조계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무슨 위원회의 회의를 마치고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환담을 한 적이 있었다.
차 한 잔 마시는 가벼운 자리였는데,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수첩을 꺼내 대통령이 하는 말을 모두 적었다.
당시 대통령의 '말씀'은 "얼마 전 지방에 갔을 때 어떤 음식을 먹었는데 참 맛이 있더라" "지금 마시는 이 차 맛이 어떠냐"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근 각 부처 장관들에게 "앞으로 국무회의에서 내가 한 말은 청와대에서 정리해 배포하니 일일이 받아 적지말고 의견을 나누도록 하자"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국무회의가 정책에 대한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하는데도, 참석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굳게 다문채 일방적으로 받아 적는 모습은 대통령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색했다는 것이다.
윗사람 이야기를 조건반사 식으로 무조건 받아 쓰는 행태는 아직도 남아있는 군사문화의 잔재다. 이번 지시 배경으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이미지 벗기'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이해는 가지만 씁쓸하다.
■그렇지만 정말 기록되어 오래 보전되어야 할 것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있던 것도 없애버린다. 바로 어제와도 같은, 지난 1980년 이후만을 봐도 반드시 보관되었어야할 자료지만 찾을 길이 없다.
격동의 고비마다 무슨 말이 오고 갔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정확한 기록은 많지가 않다. 그러니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실록'의 위대한 전통은 다 어디에 갔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앞으로 국무회의가 어떻게 변할지 두고 볼 일이다.
이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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