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김혜순(47)시인의 자택을 찾았다. 주택과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고층 아파트였다.
“보이는게 지붕 뿐이어서 그런지 지붕이라는 말을 시어로 자주 쓰게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김 시인이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발행)을 펴냈다.
평론집이라고 하기도 에세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책이다. 이 난감함을 털어놓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롤랑 바르트의 ‘이미지와 글쓰기’ 같은 책은 무어라고 부를까요?” 말하자면 시론집(詩論集)쯤 되겠다.
그러나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교과서식으로 답하는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병적이고 관능적이며 비체계적인 여성의 시적 자아를 깊이 탐구하면서 ‘시는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김승희 서강대 국문과 교수는이 책에 대해 “한국문학사 최초로 여성의 텍스트가 태어나는 순간과 그 생리, 그 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써내려 갔다”고 평한다.
김 시인의 ‘여성시론’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시도이다. “비벼댈 언덕이 없는 탓에” 그만큼 쉽지 않았다.
오랜 탐색 끝에 그가 분석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은 것은 무속신화 ‘바리데기’였다.
버려진 일곱번째 딸 ‘바리데기’는 남의 손에서 자랐지만 친부모가 중병을 앓는다는 말을 듣고 불사약을 구하러 저승세계로 간다.
신선과 결혼해 일곱 아들을 낳고 약을 가져와 이승의 부모를 살린 바리데기 이야기는 효녀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바리데기 텍스트에서 효 이데올로기라는 포장을 걷어내고 여성의 예술적 감수성을 찾아낸다.
바리데기는 저승에서 가사노동을 했고, 자신이 빨래하고 밥 짓는 물이 불사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약으로 부모를 치유한 뒤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한다.
김 시인의 시선은 여성의 노동이 샘물을 약수로 바꾸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대목에 집중한다.
여성이라는 시적 자아는 버려졌지만 살아나서 죽음의 그림자를 생명의 꽃으로 피워내는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를 “자기 안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기나긴 도정”으로 규정한다.
시인은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 시를 ‘출산’한다. “글쓰기라는 사랑의 행위가 있었기에 텍스트 창조라는 출산 행위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시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이면서도 모성(母性)을 갖는 창조물이 된다.
이 책은 김 시인이 처음 펴낸 이론서다. 그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이지만 그 동안 시를 쓰고 동화를 짓는 작업에만 전념해 왔다.
신춘문예 평론 부문 입선자로 처음 이름을 알렸건만 지금껏 평론은 쓰지 않았다.
“시가 산문 속으로 잠겨들까 두려웠다”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그만큼 이 책은 오래 참은 뒤에 나온 것이다. 장문의 글을 쓰면서도 그는 시를 짓듯 순간순간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렸다고 한다.
이제 한 권의 책을 묶은 그는 더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에 깊이 가라앉힌다.
산문을 쓰느라 한 켠에 담아 놓아야 했던 시어가 샘물처럼 솟아나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새 책에 대해“시로는 쓸 수 없었던 어떤 진술을, 시가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 산문성을 풀어놓았다”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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