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8일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수아 미테랑이 전립선암으로 작고했다.향년 80세. 프랑스인들이 샤를 드골에게 느끼는 일체감이 워낙 강해 미테랑이 20세기 프랑스 정치를 대표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미테랑은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체제 안에서 드골과는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가 작고한 이튿날인 1996년 1월9일 프랑스의 일간 신문들은 드골이 작고한 이튿날인 1970년 11월10일 이래 최대의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저널리스트 겸 변호사로 이력을 시작한 미테랑은 제2차세계 대전때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거쳐 종전 뒤인 1947년 31세의 나이로 사회당 내각의 퇴역군인 담당 장관이 됨으로써 정계에 나섰다.
드골이 제5공화국을 발족시킨 1958년 이래 줄곧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던 그는 1981년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나서 프랑스 민주동맹의 현직 대통령지스카르 데스탱을 누르고 제5공화국의 네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중 치러진 총선에서 사회당이 패배해 두 번의 좌우 동거내각을 겪기도 했지만, 미테랑은 두 차례의 7년 임기를 무사히 마쳐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관저)에 가장 오래 머문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미테랑 정권 14년은 특히 그 후반부에 연이은 부패 스캔들로 기력을 잃었지만, 프랑스에서 좌파 정권이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하나만으로도 일정한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할 만하다.
미테랑은 집권 직후사형제도를 폐지해 프랑스 혁명 이래 모든 형사 피고인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던 단두대를 역사의 유물로 만들었다.
그는 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후프랑스 최고 권력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필가이자 인문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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