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번화가인 오차로드 한가운데 자리잡은 다카시마야 백화점. 세계 물류ㆍ유통중심지인 싱가포르의 간판 백화점답게 각국 유명 브랜드 제품들이 매장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제품의 꼬리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결같이‘Made in China’가 선명하다.아동용 의류와 신발, 학용품과 장난감에서부터 심지어 첨단 가전제품까지, 몇 해 전만 해도 싱가포르 현지와 인근 말레이시아,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차지했던 진열대를 요즘은 중국산이 모조리 차지했다.
다국적 기업들이 앞 다퉈 동남아를 떠나 제조공장을 중국으로 옮긴 결과다. 일본 아동복 브랜드인 준코 코시노의 점원 엘라니 수(21)씨는 “브랜드 충성도가 강한 소비자들도 더 이상 중국산이냐 일본제냐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경기가 나빠지면서 비교적 값이 싼 중국산을 찾는 고객들이 더 늘었다”고 전했다.
백화점 직원 크리스틴 테오(22)씨는 “아직은 OEM(주문자상표표시)방식이 대부분이지만, 대등한 품질의 중국 자체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기의 아세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은 자국 구멍가게까지 파고든 중국산 제품의 공세와 중국으로 흘러가는 기업ㆍ투자 ‘엑소더스’로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지난 20여년간 전기ㆍ전자 등을 중심으로 전세계 다국적 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이들국가들은 중국의 급성장에 따른 산업 공동화 및 내수ㆍ수출시장 잠식, 외국자본의 투자 감소라는 ‘복합 위기’ 앞에 산업구조 재편과 투자유치ㆍ자유무역으로 힘겨운 대응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민들은 지난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가장 혹독한 한해를 보냈다.외국인 투자는 고갈됐고, 소비는 얼어붙었으며, 다국적기업의 해고 열풍은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다. 2000년만해도 11%의 고성장을 자랑하던 경제는 지난해 4ㆍ4분기 -7%성장으로 곤두박질쳤다.
실업률이 4.5%로 치솟으며 ‘건국이후 최대 위기’라는 말까지 심심찮게 등장했다. 위기는 전체 수출의 30%를 차지하는 미국시장의 경기 침체와 반도체가격하락 등으로 지난해 수출이 전년보다 22%나 감소했기 때문이지만 외국인 투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구조 탓도 컸다. 중국이 외국인직접 투자를 대거 흡수해가면서 싱가포르의 불황의 골은 더 깊어졌기 때문.
중국은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 아시아에 대한 전체 외국인 투자의 80%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만큼 아세안 지역에 대한 외국의 투자는 고갈되고 있다. 고촉통(吳作東)싱가포르 총리가 최근 “중국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경제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선 배경이다.
이 같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은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 지난해3ㆍ4분기 성장률이 전년동기 대비 -1.3%로 뒷걸음질치는 등 몸살을 앓고 있다.
여기에다 부실 금융회사와 기업들에 대한 '미완'의 구조조정으로 말레이시아 경제에 불안을 느낀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서 2000년 4월 303억 달러까지 늘어났던 외환보유액이 최근 200억 달러대로 뚝떨어졌다.
콸라룸푸르 스타지는 다국적 전자기업이 몰려있는 페낭 전자산업단지에서 지난해 2만9,837명이 해고당했다고 전했다. 값싼 노동력과 정치적안정 때문에 말레이시아에 투자했던 소니 도시바 노키아 모토로라 삼성전자 등 세계적 전자회사들도 말레이시아 투자를 보류하거나 축소하며 속속 중국으로옮겨갈 채비를 하고 있다.
미국 ON반도체의 경우 2002년까지 전 공장을 중국 쓰촨(四川)성으로 옮길 계획이다. 말레이시아노팅햄 대학 령 카이 힌 교수(경제학)는 “아세안 경제통합체 출범 등 보다 매력적인 투자환경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외국자본은 중국으로 몰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세안의 생존전략
이 때문에 아세안 국가에선 요즘새로운 성장엔진을 찾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싱가포르는 경제재건 계획 수립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말레이시아는 금융ㆍ산업 구조조정의 고삐를 죄고 있으며, 태국과 베트남은 산업화를 서두르며 자유무역지대에 동참하는 등 아세안 각국들이 거대한 위안블록의 일원이 되기 위한 다양한 처방을 내놓고 있다.
싱가포르정부는 부총리 산하에 서비스 산업 육성과 인력개발, 세금제도 개선 등 7개 부문별 경제재건위원회를 두고, 올 4월을목표로 향후 50년의 경제정책을 새로 짜는 ‘싱가포르 재건(Remaking Singapore)’플랜을 만들고 있다.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의 리영영(李榮榮) 과장은 “새 계획은 싱가포르에 진출하는 전세계 기업에게 무역과 투자 서비스를 최대한 보장하고 우수한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라며 “중국으로 들어가는 자본과 싱가포르에 투자하는 자본은 성격은 서로 다르며, 아시아는 물론, 인도ㆍ중동ㆍ호주를 연결하는 싱가포르는 중국에 진출하는 해외 기업들의 매력적인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도 단순 제조업과노동집약형 산업을 포기하는 대신 교육과 관광, 바이오 산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성장플랜을 짜고 있다. 외국인 재투자에 세금을 면제하는 인센티브제를실시하고,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 창설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대비책들을 마련하고 있다.
기업구조조정도 서둘러 마하티르 정부는 말레이시아 최대의건설ㆍ엔지니어링 회사인 레농그룹 경영진을 부실 책임을 물어 교체한데 이어 정치권 실세와 연줄을 대고 있는 IT지주회사테크놀로지 리소시스사의 회장을 경질했다.
또 2020년까지 500억링기트(약 17조5천억원)를 투입, 말레이시아를 IT 선진국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멀티미디어 슈퍼코리도(MSC)’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경제계획국 총리 자문역 마하니자니알 아비딘 박사는 “2003년 아세안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되고 중국시장이 열리면 중국인들이 오히려 교육과 관광ㆍ서비스를위해 말레이시아로 몰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부상이 아세안의 쇠퇴를 의미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들 국가들은 정확한 좌표설정과 치밀한 준비로 중국 경제의 급팽창에 따른 위기를 위안경제권의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싱가포르·콸라룸푸르=김호섭기자
■싱가포르 경제개발청 세토 록 연 부국장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Economic Development Board)은 싱가포르의 경제기적을 이끌어온 계획경제의 상징이다. 1961년 창설된 이후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수많은 다국적기업의 아시아 본사를 싱가포르에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EDB의 국제관계(아시아ㆍ태평양)담당 세토 록 연(司徒鹿然) 부국장은 싱가포르의 전략을 “물류중심에서 지식기반중심으로 발전시키면서 명실상부한 중화경제권의 지역센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중국 변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전략을 짜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그는 “중국이 통상적인경제발전 단계를 뛰어넘어 저임금 산업에서부터 첨단 고기술까지 동시에 발전하는 ‘입체적’ 경제성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위협적”이라고 전제하고 “세계경제 침체와기술변화 중국의 부상 등 3가지 요인을 반영한 새로운 경제플랜을 짜고 다”고 말했다.]
세토 부국장은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더 나은 교육과 의료ㆍ법률ㆍ금융ㆍ서비스를 원하는 만큼이에 맞는 교육과 서비스를 중국인들과 중국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싱가포르는 시카고대와 존스홉킨스 MIT 일본 와세다 등 세계 유명 대학의 캠퍼스를 유치,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주변국들의 젊은이들이 외국에가지 않고도 반 값에 똑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트윈-프로그램(twin program:현지대학 2년 마친 후 3년 편입)을 개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싱가포르가 제조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경제안보 차원에서 국내총생산의 25%를 제조업에 의존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세토 부국장은 “싱가포르는 소비시장은 작지만 ‘기업시장’은어느 나라보다 넓다”며 “정치적 안정과 경제의 투명성이 싱가포르의 가장 큰 무기”라고 말했다.
김호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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