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동화 당선작 - 보리암 스님(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동화 당선작 - 보리암 스님(2)

입력
2002.01.04 00:00
0 0

상구는 할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연거푸 이겼다."이젠 맞둬도 되겠어요."

차와 포와 상을 떼고도 내리 지기만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기분이 좋았다.

"좀 누워야겠다."

할아버지는 피곤한 듯 자리에 누웠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괜히 장기를 두었다 싶었다.

"읍내에 좀 갔다 올게요."

상구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고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할아버지는 부쩍 기운이 없어 했다. 결핵은 잘 먹어야 한다는데 만날 나물만 먹으니 기운이 날 리 없었다. 그러나 상구가 버는 돈으로는 쌀값 대기에도 벅찼다.

보건소에 들러 약을 타고 돼지고기를 사고 나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상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구는 서둘러 밥을 짓고 찌개를 끓였다. 이미 주위는 깜깜해져 있었다.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밥상을 들고 들어갈 때까지 할아버지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할아버지, 진지 드시고 주무세요."

잡아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으며 간간이 앓는 소리도 냈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상구는 수건을 적셔 땀을 닦아냈다.

할아버지는 밤새도록 헛소리를 했다. 상구를 부르기도 하고 아버지를 부르기도 하고 엄마를 부르기도 했다. 간혹 알지 못하는 사람도 불렀다. 그럴 때마다 상구는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깨어났다.

'주지스님이라도 부를까.'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의사도 아닌데 주지스님이 어떻게 할까, 한밤중에 올 리도 없겠지만.

상구는 불을 켰다.

"어어어!"

형광등 불빛에 할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헛소리를 했다. 상구는 옆에 놓인 수건을 들어 할아버지 얼굴을 닦았다.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는데, 답답했다.

그 때 장기판 위에서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돌부처가 눈에 들어왔다.

"부처님, 우리 장기 한 판 둬요."

상구는 수건을 던져놓고 장기판을 끌어냈다.

"부처님이 이기면 내가 주지스님 상좌로 가고, 내가 이기면 우리 할아버지 낫게 해 주기요."

"베개 위에 돌부처를 올려놓고, 장기알을 골랐다.

" 부처님은 한나라 하세요, 난 초나라 할테니."

상구는 혼자서 파란 알과 빨간 알을 모두 두었다.

"부처님, 상 받으세요!"

먼저 상구가 공격했다.

"마 받아라!"

부처님은 마로 상을 잡고 병을 공격했다. 상구는 병을 앞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부처님이 차로 공격해 왔다.

혼자서 부처님 것까지 두자니 머리를 두 배로 써야 했다. 그러나 상구는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직하게 두었다.

"자, 포장이오!" " 이크, 큰일났군!"

부처님은 상구의 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제가 이겼죠!"

"분명히 제가 이겼어요!"

"..."

그러나 부처님은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상구는 갑자기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사이에 창 밖이 희붐해지고 있었다.

"아범아, 어어어!"

할아버지는 여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졌다!"

부처님이 장기알을 꽝,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꿈인지 실제인지 모를 정도로 분명한 소리에 상구는 벌떡 일어났다. 어느 새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이제 일어났니?"

놀랍게도 주지 스님이 와 있었다. 주지 스님은 할아버지 곁에 않아서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산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없기에 내려와 봤더니, 큰일날 뻔했구나. 이제 곧 병원에서 사람들이 올 게다,"

주지 스님 말대로 곧 구급차가 도착하여 할아버지를 실어갔다.

"그 동안 여러 군데 말을 해 놨더니 어제 저녁에야 소식이 왔구나.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검사 마치는 대로 요양원으로 가실 거다.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나라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곳인데, 거기가시면 일이 년간은 무료로 치료받으실 수 있을거다."

이제까지는 엄마가 주민등록에 있어서 할아버지가 무의탁 노인으로서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주지 스님의 설명이었다.

"넌 이제 어떡할 거냐?"

구급차가 비탈길 아래로 완전히 사라지자 주지스님이 물었다. "여기서 혼자 살 거야, 도깨비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너 모르지, 혼자 사는 어린애만 잡아가는 도깨비가 이 산에 살고 있다는 거?"

주지 스님은 일부러 먼 산을 보며 말했다.

"스님 상좌로 들어가면 정말 학교에 보내 줄 거예요?"

"공짜로야 보내 줄 수 있나,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야 보내주지."

"저 혼자서 그걸 다 해요, 스님은 뭐 하시게요?"

"나야 네가 잘하나 못하나 감독하지, 시간 나면 농사도 짓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더덕이나 캐러 다닐까?"

"더덕이 있어요?"

"저쪽 계곡에는 있지."

주지 스님이 턱으로 가리킨 계곡은 어른 걸음으로도 한나절은 가야 하는 곳이었다.

"더덕은 폐에도 좋지만 위와 간에도 아주 좋거든. 독한 약을 먹는 사람한텐 꼭 필요한 약초지. 결핵에는 고기 먹는 것도 좋지만 더덕 같은 약초로 장기를 튼튼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상구는 어느새 주지 스님의 모습이 꿈 속에서 보았던 부처님 같았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한테 이긴 거야, 진 거야?'

주지 스님을 따라 올라가다 말고 상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