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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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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4)

입력
2002.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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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Ⅲ: 극중 극 ‘춤추는 죽음’(왕의종소리와 함께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광대와 사제가 왕(연출가)의 주위에 서 있다. 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무대 가운데 서 있다. ‘죽음’은대본을 들고 주위를 서성거린다)

광대: 폐하, 저 년이 바로 죽음을 보았다고 거짓소문을

소녀: (두 손을 모으고는) 하나님, 우린 지금의 우린 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진 아무 것도 몰라요. 하지만 만사 잘되길 빌어요.(죽음의 손을 붙잡으며) 까만 망토를 입고, 하얀 얼굴을 가린 채, 등 뒤에 숨어서, 매일매일 갈 길을 재촉하며, 나에게 속삭이지만,갈 곳은 없어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빛도 없고 어둠도 없고,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어요. 아무 것도…

(‘죽음’은소녀를 뿌리친다)

사제: 그게 무슨 기도야?

죽음: (대본을 구겨 버린다) 오, 이런, 내용이 엉망이 됐어.

왕: 됐어. 그리고 만약 네가 광대라면 춤을 추고 노래를 해 봐.

소녀: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며 노래한다)

죽음앞엔 미소짓고 주님 앞엔 윙크하고

거울앞엔 조소하고 여자 앞엔 발끈하고

나말고는 못 믿지만 나 자신도 포함해서

누구든지비웃으며 천당지옥 알 바 없는

죽음앞엔 윙크하고 주님 앞엔 발끈하고

거울앞엔 폭소하고 남자 앞엔 윙크하고

지옥천당알 바 없는 까만 망토 하얀 얼굴

등뒤에서 재촉해도 누구든지 비웃으며 딱 한번 더 비웃으며

(소녀는춤을 추면서 점점 ‘죽음’에게로 다가간다. 지치지도 않고 춤과 노래를 계속하다가 ‘죽음’의 품에 안겨 혼절한다)

죽음: (소녀를 흔들어 깨우며) 이것 봐,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러다가 죽는 거 아냐?

(소녀는꼼짝하지 않는다. 왕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사제와 광대도 따라 한다)

왕: 죽음이여! 이 영혼을 거두어 가십시오.

사제: 하늘에 바치는 신성한 제물이옵니다.

왕: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내려오지 마십시오.

광대: 다시는 내려오지 마십시오. 다시는.

(‘죽음’이소녀를 안고 일어난다)

죽음: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야.

왕: 죽음은 늘 예정 없이 찾아오는 것.

광대: 아무도 모르게 등뒤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사제: 사는 것은 질문투성이. 아무런 대답도 못 듣고 사라지고.

왕: 오, 신이시여. 비천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얼굴을 돌리지 마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사제, 광대: 자비를 베푸소서.

(‘죽음’이소녀를 안고서 나간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진다. 효과음으로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들린다)

■에필로그

(연출가가테이블에 앉아 혼자 체스를 두고 있다. 묘수가 생각난 듯 체스 말을 옮겨놓는다)

연출가: (혼잣말로) 그래, 분명히 길이 있었다니까.

(전화벨소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연출가)

연출가: 여보세요. 응. 나야. 잘 봤어? 고마워. 다들 반응이 괜찮았어. 그래. 곧 연장공연에 들어갈 거야. 워낙 요청이많이 들어 와서 말이지. 또 보러 와. 이번엔 좀 바꿀 거야. 어떻게? 아직은 모르지. 그래. 나중에 또 연락하자. 응.

(연출가는전화를 끊고 다시 체스에 몰두한다. 다시 전화벨 소리)

연출가: 여보세요. 그래. 이번에 바꾸려고. 빼버려. 응? 왜, 갑자기 빼냐고? 어쩔 수 없지. 배우가 없는데. 너 몰랐어?감쪽같이 없어졌다니까. 신고는 했고? 나도 잘 모르겠어. 어디로 간 건지. 진짜 모르겠어. 무슨 사고라도 났으면 연락이라도 올텐데. 이거 귀신곡할 노릇이지 뭐야. 아무튼 빨리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대역? 아니 그건 원래 걔밖에 못하는 거야. 대신 대본을 고치려고. 걱정 마. 훨씬 더잘 만들 자신 있어.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거든. (갑자기 잡음이 들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거 왜 이래.

(연출가는전화를 끊고 책상에 앉아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린다.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연출가: 여보세요. 누구세요? 말씀하세요.

목소리: 가자, 어서, 일어나. 난 네가 필요해.

연출가: 네? 누구세요?

목소리: 까만 망토를 입고, 하얀 얼굴을 가린 채…

연출가: 누, 누구야? 넌 누구야?

목소리: 등 뒤에 숨어서, 갈 길을 재촉하는, 이젠, 정말 가야 해…

연출가: 장난치지마! 넌 도대체 누구야?

(목소리가 끊어지고 잡음이 들린다.연출가는 전화기를 집어 던진다. 애써 태연하게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린다. 집중이 안 되는 듯 담배를 입에 문다. 라이터를 켜는 순간, 등 뒤에 ‘죽음’과소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연출가는 계속 담배를 피우면서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린다. 조명 점차 어두워지며 담배 불만 보인다. 막이 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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