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의 전쟁’ 이후 재편되고 있는 신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안보환경이 불확실성을 더해가고 있다.일본의 대표적 중국 전문가 고쿠분 료세이(國分良成) 게이오(慶應)대 교수와 한국 전문가인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東京) 대 교수는 한국일보가 마련한 대담에서2002년 동북아 정세가 결코 밝지 않다고 전망했다. 남북ㆍ북미ㆍ북일 관계 등이 동시 정체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고쿠분 교수=9·11 테러로 미국의 대외 정책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대(對) 테러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고, 미국은 앞으로도 복잡한 문제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고립주의적, 일방주의적 태도의 후퇴가 예상된다. 그럼에도 동북아 지역에선 특별한 변화를 예상하기 어렵다. 미국이 이 지역에서 누려 온 압도적 존재감, 남북관계나 중국·대만 관계가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기미야교수=미국이 고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미묘하게 정책 기조를 옮기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동북아 지역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양자관계의 중첩으로 나타날 뿐이다.
미국은 앞으로도 이 지역에서 다자간 협의체제를 구축하기 보다는 양자 관계의 강화에 나설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기대 및 요구 수준이 더욱 높아 졌다.
북한은 ‘테러 반대’를 표명, 대미 접근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나 기대수준과워낙 거리가 멀어 효과가 없었다.
아직 억측이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다음 이라크가 ‘테러와의 전쟁’의 표적이 되면, 그 다음에는 북한이 미국의세 번째 선택이 되리라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대북 인식이 엄격해졌고, 북미관계의 전망이 한결 흐려졌다고 볼 수 있다.
고쿠분=남북 관계의전망도 밝지가 않다. 포용정책을 주도해 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임기 말에 접어드는 데다 국민의 관심은 온통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쏠리게 된다.
기미야=북미 관계가정체되면 한국도 움직이기 어렵다. 다만 북한으로서는 남북관계를 미국에 대한 유효한 카드로 활용하기 위해 먼저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남북 관계는 북미 관계의 종속변수이지만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보듯 전술적 고려에서 일시적으로 남북 관계를 돌파구로삼을 수 있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북한의 움직임에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여야 모두북한에 대해 보다 어려운 조건을 설정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김 대통령이 국내 비판을 극복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북한 움직임에 대응하는 정치력을발휘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기미야=미국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남북 및 북일 관계는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다는 데 동감한다.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날로 악화하고 있는 대북 여론이 문제이다. 이 같은 국내 사정은 한국과 일본이다르지 않다.
고쿠분=일본 정부가 현재의 반대 여론을 극복하고 대북 접근에 나서기는 어렵다. 무언가 돌파구를 열어야 하지만 계기를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역사교과서와 야스쿠니(靖國)신사 문제로 빚어진 한중 양국과의 균열이 완전히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양국 방문으로 겉으로는 봉합됐지만 아직 불완전하다.
이 문제는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의 불균형을 드러냈다. 일본 경제 전체로는 극히 부분적인중국산 농산물 문제가 정치 문제화, 중일 양국의 정면 갈등을 빚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98년 한일 관계의 비약은 김 대통령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지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동일한 가치로 양 국민이 수렴한 것이 기본 배경이다. 다만 이번 역사 문제의 갈등에선 한국의 반응이 과거와 많이달라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기미야=확실히 한국의 반응은 민주화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 과거 역사 교과서 문제는 절대적 선악의 문제, 무조건 일본이 잘못이라는 식의논의가 전부였다.
이번에도 그런 모습은 보였지만 일각에서 한국 스스로의 역사 교육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는 등 상대화 조짐이 나타났다. 한일 양국의협력은 동북아 지역의 문제를 풀어 가는 기본 전제라는 인식이 양국 정부와 시민사회에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고쿠분=역사 갈등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하게 한일 관계를 진전시키면서 생긴 고름이 터진 것이기도 하다. 지금부터가 문제다.
한편으로 한일 관계의 진전이 중국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는 등 3국간의 관계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중일3국 차원의 협력 틀의 태동도 점쳐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기미야=아직은 인식의 격차가 크다. 일본은 한국을 대등한 협력자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한국은 아직 일본을 큰 나라로 보고있고 과거사와 겹쳐 의문과 불신을 안고 있다. 중국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다르다.
일본은 한국의 대 중국 인식이 순진하다고 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일본이 ‘중국 위협론’으로 한국을 자기쪽으로 끌어 당기려 한다고 본다.
다만 한국은 중일 양국의 균형추 역할을 통해 국익을 얻으려는 발상에 익숙하다. 이런점에서 한국을 중일간의 가교로 삼는 3국 협의체는 상정해 볼 수 있다.
고쿠분=테러 이후경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일본내의 ‘중국 위협론’도 안보·군사적 측면에서 경제로 옮겨지고 있다. 현재의 ‘중국 위협론’은 허점 투성이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문제와 관련, 구미에서 반년 전에 붐을 이루었던 논의가 일본에서는 역사문제에 밀려 최근 들어서야 뒤늦게 시작됐다.
밖에서 보는 중국과 안의 실상은차이가 크다. 중국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상하이(上海)가 중국의 전체가 아니다. 중국의 부실채권 문제는 심각하고 실업도 크게 늘고 있다.
미국의 직접 투자가 테러 이전부터 줄어 왔고 화교와 대만, 일본의 투자도 2002년에는 줄어들 전망이어서 실업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중국은지난 1년간 아예 실업률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미 10%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미야=한중일 3국의 문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논해서는 일면적 논의에 그친다. 넌 제로 섬 게임을 상정한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변화의 조짐도 있다.
고쿠분=자위대의전시 해외 파견을 두고 한국의 특별한 반발이 없었고 중국의 반응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물론 ‘테러와의전쟁’이라는 명분, 미국의 분명한 요청에 따른 것이어서 한중 양국이 반대하기 어려웠다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제 일본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때도 됐다는 인식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힘이 빠진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반드시 재생, 위협이 되리라는 정형화한 인식 대신 정말 일본의체력이 떨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기미야=한국에서도그런 경향은 부분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할 뿐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존재감은 여전히크다.
고쿠분= 20세기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과오를 범했지만 100년을 통틀어 근대화로 치달아 늘 아시아에서 선두를 지켰다. 일본의 꿈은늘 혼자 이기는 것이어서 추격자에 대한 배려를 결여했다. 그런 시대는 끝났고 아시아의 전체적인 ‘평준화’가 진행되고 있다.
기미야=아시아의평준화로 일본 혼자서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는 줄어 들었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한 나라와 협력할 경우 할 수 있는 일은 늘었다. 일본의 외교 자원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늘어났다.
고쿠분=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에 이어 다시 10년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일본은 자신감을 잃었다. 자위대 파견 문제도 걸프 전당시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고도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했던 악몽도 작용했지만 과거처럼 큰 부담은 지기 어렵다는 묵시적 공감이 작용했다.
일본 내에 파병 반대론이 거의 일지 않았다. 2차 대전의 악몽에서 군사·안보 문제는 무조건 반대했던 국민 의식이 변화하고 있다. 부정적 요소를 제거한 참된의미의 ‘보통 국가’로 향하는 방향성이 보인다.
기미야=아시아의평준화라는 틀 안에서 일본이 ‘보통 국가’가 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다만 주변국의 군사 대국화 우려를 자극하지않기 위해서도 역사문제는 보다 분명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고쿠분=일본에 그런지적 지도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대응도 고이즈미 총리의 특별한 노선에서 나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외교 노선은 백지와 다름없다.
정리= 황영식 도쿄 특파원
yshwang@hk.co.kr
●고쿠분 료세이 / 게이오(慶應)대 교수
48세.게이오대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후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게이오대 조교수를 거쳐 92년부터 교수.현재 게이오대 지역연구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으며 일본내 최고의 중국 전문가로 통한다.'중국정치의 민주화' '중화인민공화국''아시아시대의 검증-중국의 시점에서'등 저서가 있다.
●기미야 다다시 / 도쿄(東京)대 교수
42세.도쿄 법학부 정치학과,박사과정을 마치고 고려대학교에 5녀간 유학,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호세이 대 법학부 조교수를 거쳐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조교수가 됐다.차세대 한국전문가 그룹의 기수.'한국과 일본-새로운 만남을 위한 역사 인식'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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