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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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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1)

입력
2002.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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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등장인물

연출가: ‘춤추는 죽음’이라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기까지 한다.극중 극에서는 ‘왕’역을 맡는다.

죽음: 어느날 리허설 도중에 연출가의 눈앞에 나타난 죽음의 전령. 검은 망토를 입고, 후드사이로 하얗게 칠한 얼굴이 드러난다. 오로지 연출가에게만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않는다.

소녀: 연출가의 주문대로 무대 소품인 ‘죽음의 가면’을 만든다. 그 가면은 ‘죽음’의 얼굴과동일하다. 처음엔 스텝이었으나, 이후 연출가에게 발탁되어 배우가 된다. 극중 극에서도 ‘소녀’ 역을 맡는다.

배우1: 극중 극에서 ‘사제’ 역을 맡는다.

배우2: 극중 극에서 ‘광대’ 역을 맡는다.

■무대

전체적인 무대 이미지는 텅 빈 지하 창고를 연상시킨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단순하고 기능적인 소도구들 몇 개면 충분할 것이다.

연극은테두리 극과 극중 극으로 나뉜다. 테두리 극의 무대는 연출가의 작업실이다. 작은 책상에 타이프라이터가 놓여 있다.

주위에 작은 의자 몇 개가 있다.극중 극의 무대는 리허설을 위한 연습실이다. 가운데 왕좌, 왼쪽에 광대의 그네, 오른쪽에 사제의 제단이 놓여 있다. 왕좌는 위엄이 없이 넓고 평평한침상이다.

■프롤로그

(타이핑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밝아오는 부분 조명. 무대 전면 가운데에는, 연출가가 작은 책상에 앉아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고 있다. 동시에 무대 후면에는,후드가 달린 까만 망토를 입고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한 ‘죽음’이 연출가 뒤를 매우 느리게 지나간다. 연출가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죽음’은이따금 연출가를 의식한다)

(연출가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반영하듯 뒤엉킨 선율의 현악기 연주음악이 서서히 흘러나온다. 그는 음악에 맞추어피아노 반주를 하듯 서서히 타이핑을 한다. 음악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커진다. 그는 음악의 리듬과 템포에 점차 압도당한다.

결국 그는 음악을 따라잡는데지쳐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순간 음악도 함께 멎는다. 고요해진 무대. ‘죽음’은 연출가에게 마지막 시선을 보낸 뒤 밖으로 나간다)

(생각에 잠긴 채, 무대 주위를 서서히 걷는 연출가.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뒤엉킨 선율의 현악기 연주음악이다시금 서서히 흘러나온다. 점차 빨라지는 음악. 그는 또다시 음악의 리듬과 템포에 압도당한 듯 점차 빨리 걷다가, 이내 무대 주위를 달리기 시작한다.한없이 커지고 빨라지는 음악. 자신을 짓누르는 음악소리에 고통스러워 하며 도망가듯 달리는 연출가. 이때 무대 오른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커다란‘죽음의 가면’- 까만 후드를 쓰고 얼굴엔 하얀 분칠을 하고 있다 - 을 보고 기겁하여 쓰러지는 연출가. 순간, 음악이 완전히 멎는다)

연출가: (놀라며) 누, 누구야?

(‘죽음의가면’이 까르르 웃는다. 가볍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은 웃음소리. 가면을 벗자, 가냘프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이 드러난다)

소녀: 연출 선생님, 저에요.

연출가: (진정하며) 난 또 누구라고.

소녀: 뭘 그렇게 놀라세요? 선생님 때문에 저까지 다 놀랬잖아요?

연출가: (가면을 보며 신기한 듯) 아니, 이걸 어디서 구했어?

소녀: 어디서 구하다뇨? 이건 제가 직접 만든 거라구요.

연출가: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소녀: 그럼요.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걸 따라서요. 어때요? 맘에 드세요?

연출가: 그래. 내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아.

소녀: (손뼉을 치며) 다행이에요. 실컷 만들어놓고 또 퇴짜 맞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연출가는가면을 무대 뒷벽에 걸어두고는 한동안 주시한다)

연출가: (만족해 하며) 네가 마치 내 머리 속을 들여다본 거 같아. 네가 만든 이 가면이야말로 우리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의미가 될 거야. 정말 훌륭해.

소녀: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연출가: 아니야, 정말 훌륭하다니까. 저 가면 하나만으로도 무대가 꽉 찬 느낌이 들어. 아직 미완성인 이번 작품에 대단한영감을 주고 있단 말이야.

소녀: …

연출가: 내 말을 못 믿겠니?

소녀: (한동안 침묵하다가)전 언제쯤 무대에 올라가 보나요?

연출가: 글쎄, 안타깝지만 이번 작품엔 네가 맡을 만한 배역이 없구나.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생각해보자. 대신 네가 만든훌륭한 소품이 이번 무대를 가득 채워줄 거야.

소녀: 그렇군요. 저 유령 같은 가면이 저 대신에 무대에 서는 거로군요.

연출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좋아, 다시 연습을 시작해야겠어.(나간다)

(무대 뒷벽에 걸린 가면 앞으로 다가가는 소녀. 까르르 웃는다. 맑은 웃음 소리가 처연하게 들린다)

소녀: 그럼, 이게 제 얼굴이네요?

(대답이 없다. 연출가는 이미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소녀, 벽에 걸린 가면을 떼어서 만져본다)

소녀: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예쁘게 만들 걸 그랬어요.

(조금씩소리내어 우는 듯한 현악기의 울림소리, 반복된다. 가면을 어루만지는 소녀에게로 조명이 집중되다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리허설Ⅰ: 극중 극 ‘춤추는 죽음’

(깊은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왕국의 궁전. 고전적인 디테일보다는 현대적인 양식화로 단순한 무대 이미지. 무대 가운데 왕좌, 왼쪽에 그네, 오른쪽에제단이 놓여 있다. 부분조명이 희미하게 왕좌를 비춘다. 의관을 갖춘 왕(연출가)이 불편하게 잠들어 있다. 이따금 악몽을 꾸는 듯 몸을 뒤척인다.어느새 ‘죽음’이 다가온다)

죽음: (낮은 목소리로) 가자, 어서, 일어나.

(왕은꼼짝하지 않는다)

죽음: 이젠 정말, 가야 해.

(‘죽음’은왕 곁에 잠시 머문다)

죽음: 다시 오겠어. 그때까지, 준비를 해 둬.

(‘죽음’은퇴장한다. 잠시 후, 왕이 일어난다. 주위를 살핀다)

왕: (혼잣말로) 왔어. 분명히, 왔단 말이야. 이번엔 정말, 틀림없어.

(왕이자그만 종을 울린다. 조명이 밝아지고 사제와 광대가 등장한다. 사제가 제단에 촛불을 켠다. 광대는 하품을 하며 그네를 탄다)

왕: (넋이 나간 듯 혼잣말로) 그가 왔어. 그가 날 찾아 왔어.

사제: 누구 말입니까?

왕: 까만 망토를 입고.

광대: 얼굴엔 하얀 분칠을 하고.

왕: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사제: 밤새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는데.

광대: 사람은 없었지. 대신 쥐새끼 한 마리를 본 거 같아.

사제: 폐하. 악몽을 꾸셨나 봅니다.

왕: 그러면 다행이게. 하지만 나는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했는걸.

광대: 그 쥐새끼는 까만 망토를 입고, 얼굴엔 하얀 분칠을 하고.

사제: (광대에게) 닥치지 못하겠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거짓말을…

왕: 까만 망토를 입은 건 사실이야.

광대: 사실이야. 그리고 그게 꿈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지.

왕: 너도 무언가를 본 모양이군. 그게 무엇이었을까?

광대: 죽음이옵니다, 폐하.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지니…

사제: 폐하. 이 자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자고로 하나님은 이 땅에 사제를 보내셨고, 악마는 저 광대를 보냈습니다.(성호를 그으며) 아멘.

왕: 어쨌든 내게 죽음이 찾아 왔단 말이로군.

광대: 딩동댕. 바로 맞췄네요. 역시 똑똑하셔.

(어느새‘죽음’이 무대 후면에 서 있다. ‘죽음’은 무대 주위를 둘러보며 자유롭게 걸어다닌다. 그러나, 무대 위의 세 인물들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또한 ‘죽음’이 하는 말도 듣지 못한다)

왕: 난 할 일이 많아. 왜 하필 내가 죽음을 따라 가야 하지?

광대: (그네에서 내리며 장난스럽게) 그럼 제가 대신 갈까요?

죽음: 그건 안되지.

사제: 폐하. 설사 죽음이 찾아 왔더라도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광대: 맞는 말이야. 어차피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습니까?

사제: 말을 삼가시오. 어느 안전이라고.

광대: 제 말씀은 그러니까, 어제 일은 오늘로 미루고, 또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고 하다 보면, 그때는 무슨 수가 있겠죠.

사제: 도대체 무슨 뜻이야?

광대: 제 말이 어렵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시 말해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할 지어다. 네가 장차 갈 곳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바로 이겁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죠.

사제: (성경책을 넘기며) 감히 악마의 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읊어대다니.

광대: 아, 그 말이 맞았군요. 대충 넘겨짚었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얘길 했다죠? 방금 한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죽으면 만사 끝이니까 살아 있을 때 즐겁게 살아라.” 바로 이런 뜻이죠. 아시겠습니까?

왕: 무엇이 즐거운 삶일까?

사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복음에 복종하는 삶이죠.

광대: (다시 그네를 타며) 인생은 연기입니다. 어떤 역은 좋고, 또 어떤 역은 좋지 않지요. 폐하께서는 어떤 역을 해보셨습니까?

왕: 나는 태어날 때부터 왕이었어.

광대: 그럼 이제 한편의 연극이 끝날 때가 되었나 보군요. 왕의 역할이 끝나면 폐하께 다른 역할이 주어질 겁니다. 피할수 없는 역이겠죠. 어쨌거나 결국엔 뭐가 될까요? 거 참, 궁금해지네.

사제: (성경책을 들고서 왕에게 다가간다) 저희 같은 범인들은 영벌에, 그리고 폐하 같은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십니다.(왕에게기도를 해준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하나님의 복음에 복종하지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광대: (왕에게 귓속말로) 폐하, 폐하. 솔직히 말해서 폐하께서는 착한 일을 하신 적이 없죠? 에이, 솔직히 탁 까놓고말해봐요.

왕: 그런가?

사제: 이런 건방진 놈! 이놈을 당장 사자우리 안에 집어넣을까요?

광대: 오, 아니지. 한 가지 있습니다. 딱 한가지. 폐하께서는 이 광대를 궁중에 두시고 폐하의 심중이 괴로울 때마다벗삼아 노시도록 하셨지요. 아주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그게 바로 폐하가 행하신 유일한 선행이 아닐까요?

사제: 폐하. 저희 궁전은 너무 낡았고 너무 어둡습니다. 그래서 폐하의 마음이 허약해지신 겁니다.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다가새로 웅장한 궁전을 짓는 게 어떨는지요.

광대: 폐하. 어차피 명이 다 하신 거 같은데, 그냥 살던 데서 가십시오. 아무리 돈을 처발라 삐까번쩍한 궁전을 지어도죽음은 금새 방문을 열고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제: 페하, 밝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십시오. 악을 행한 자만이 어둠을 사랑합니다.

광대: 오호, 그래서 내가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구나.

사제: 폐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폐하.

(왕은아까부터 ‘죽음’을 발견한 상태이다. 그는 ‘죽음’의 움직임을 주시하느라 자신의 대사를 놓치고 있다)

사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폐하.

(여전히‘죽음’을 지켜보는 왕.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극중 극이 깨진다)

사제: (짜증을 내며) 뭐해요? 명령을 내려 달래니까요?

광대:그 새 까먹은 거야?

(‘죽음’이분위기를 눈치채고 서둘러 퇴장한다. 왕은 ‘죽음’을 따라 나가려 한다)

광대: (왕에게) 연출! 왜 그래요? 정신 좀 차려요.

왕: (무엇에 홀린 듯하다가 깨어나며) 응? 벌써 내 차례야?

사제: 아, 이거 못해 먹겠네. 벌써 몇 번째야. 연출이 연기까지 하는 건 정말 무리야.

광대: 출연료 아끼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사제: (바닥에 주저앉으며) 좀 쉬었다 하죠.

왕: (여전히 무엇에 홀린 듯) 정말 그가 왔어. 그가.

(사제와광대 역의 배우들은 바닥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왕(연출가)만이 고민에 빠진 듯 서 있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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