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림(林京林ㆍ41)씨는 “시는 구원이었다”고 말했다.많은 시인 지망생에게 시는 ‘종교’와 같은 말이다. 시는 지극히 높은 곳에 있어 성스럽고, 등단의 제단은 한없이 멀다.
그러나 임씨에게 시는 그보다 더한, 목숨을 살리는 생명줄이었다.
임씨가 신춘문예에 대한 꿈을 품게 된 것은 8년 전부터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뒤 조금씩 글을 써보긴 했지만, 막연한 동경뿐이었다.
1993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굴곡을 겪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자리잡고 평탄하게 살던 임씨는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혔고, 쫓기듯 고향인 경북 고령으로 돌아왔다.
햇볕 아래 서있는 게 두렵고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배운 게 죄라 접시 닦는 일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던 임씨는 그때부터 시에 몰두했다. 문학강좌를 찾아 다니면서 공부했다.
수강료도 밀리기 일쑤였고 때로는 차비조차 없을 정도로 쪼들렸지만, 열정만 갖고 무작정 매달렸다.
그는 무엇보다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시작(詩作)의 동기가 됐다고 한다.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남편이었지만, 사업 실패 후 스스로를 추스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상대를 미워하는 만큼 자신도 망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 임씨는 시를 썼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워서 시작한 시가 미움을 사그라뜨렸다. 맺힌 감정을 시에 쏟아내면서 위안을 얻었다.
남편을 향한 가슴의 못이 빠지고 평온해졌다. “시가 종교를 대신하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오랜 소망을 이룬 임씨는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쁘기도 했지만 큰 일을 저지르고 만 듯한 두근거림이 이내 찾아왔다”며 “절벽을 만난 듯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말한다.
당선작은 그가 경북 포항시의 운흥사에서 붙잡은 시상을 옮긴 것이다.
운흥사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의 배경으로 알려진 절이기도 하다.
어느 봄날 운흥사 절마당에 들어섰을때 수천 년은 된 듯한 산벚나무가 천 개의 젖무덤을 열어젖히고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미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운흥사는 꿈꾸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말뚝처럼 우뚝 그 자리에 붙박혔던 감동이 한 편의 시가 됐다.
평범한 주부에서 막 시인으로의 첫발을 내딛는 임씨는 ‘여성’이라는 한계에 갇힐까 두렵다며 여성의 틀을 깨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여성이되 여성성을 뛰어넘은” 김혜순, 이경림 시인을 흠모한다. 그는 또 ‘보폭이 넓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현실에서 단초를 가져오되 우주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시를 쓰는 것이 꿈이다.
임씨는 올 겨울 둘째 아들이 지은 동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운 심성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이 지은 시 좀 들어보실래요?”라면서 임씨는 동시를 줄줄 읊는다.
그는 “내년에는 동시 부문에 다시 도전할 것”이라고말했다.
김지영기자 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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