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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돼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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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돼지(5)

입력
2002.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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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점점 건너편 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병수는 몸뚱이만 남은 돼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여유를 부렸다. 도로가 막힌다는 상현의 어머니의 불평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병수는 손놀림을 더 늦추며 기분을 삭혔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기석의 핀잔으로 잠시 잠잠했던 석진이 상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아까두 말했지먼 읍내에서도 자네칭찬이 자자 혀. 언젠가는 내려와서 큰일 한번 해야지? 내가 읍내 생활을 허면서 여론 조성에 힘쓰구 있다구.”

석진의 말이 어이가 없게 들리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모닥불 위로 모아졌다.

“형님두. 저는 아직 과장에 불과해요.”

상현도 석진의 과장된 표현이 불편한 듯 병수와 기석 쪽으로 다가왔다.

“쓸디 ?졍? 소리허네. 여론이 중요헌겨. 아무튼 기회가 되면 우리가 적극 밀어야 혀.”

석진은 상현의 뒤를 따라오며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너야말로 쓸디 ?졍? 소리 허지말고 읍내가서 여론조성이나 신경 써.”

기석이 석진에게 핀잔을 주었으나 이번에는 석진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병수는 상현과 석진이 동시에 다가오자 소름이 돋는 것처럼 불편했다. 병수는 고개를 처박은 채 도끼로 돼지 등뼈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도끼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뼛조각이 몇 개가 튀어 올랐다. 새끼를 낳았더라면 몇 년은 더 살았을 놈이었다. 아니, 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팔리고, 무참히 살해되어 고기밖에 되지 못할 바에야, 대를 끊고 저 혼자 희생하는 걸로 비극을 마감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병수는 잘라내고 불로 지져버린 고환 밑 심줄을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도끼질을 했다.

“어이 살살 쳐, 이 사람아.”

기석이 병수의 손놀림을 보고 고함치듯 말했다. 그럴수록 병수의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이내 갈비는 등뼈에서 분리되어 옆으로 축 처졌다. 이제 부위별로 자르기만 하면 되었다.

“아주머니 어디를 짤러 주유.”

기석이 좀 누그러진 표정으로 상현의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권한을 부여했다.

“나는 갈비 조금 하고 등뼈로 주슈.”

“등뼈는 안 돼유. 내가 맡아놨슈.”

기석의 옆에서 등뼈만 보고 있던 종만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맡아논 게 어딨어. 내가 언제 이런 거 욕심 내는 것 봤어.”

상현의 어머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종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야 것네. 종만이 자네가 양보해야겠어.”

기석과 석진이 동시에 말했다. 종만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병수는 그들의 이야기는 못들은 척하며 등뼈를 분리해 돼지우리 지붕 위에 올렸다.

“등뼈는 안 되겠네유. 지가 써야겠네유. 갈비도 한쪽은 지가 써야겠네유. 나머지 가지고 알아서들 나눠유.”

“그게 뭔 말이여?”

병수는 애초부터 등뼈도 갈비도 필요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일제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여. 상현이 어머니가 가져가신다잖여.”

석진이 돼지우리 지붕 위에 올려져 있는 등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둬유. 형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그런 거여.”

생각했던 것보다 병수의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갔다. 뿐만 아니라 손에 들린 칼끝이 위쪽을 향한 채 서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해가며 침묵이 흘렀다.

“제사 지내게 갈비나 몇 대 짤라줘.”

상현이 팔짱을 낀 채 말했고 그 한마디로 교통 정리가 된 듯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얄밉게도 그의 표정에는 아무 동요도 없이 웃음까지 번져 있었다. 병수는 입을 꾹 다물고 갈비 네 대를 잘라 기석에게 건네주었다. 기석은 갈비를 받아 저울에 올렸다.

“사 키로. 엿 근 반이네. 엿 근 반이면, 엿 근 반이면은…이만 원”

기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현의 뒷주머니에서 지갑이 나왔다. 멀찌감치 서 있던 병수의 아내가 달려와 허리를 굽실하고 돈을 받았다.

“자, 가겠습니다…. 병수, 다음에 보지.”

“그려.”

병수는 짧게 대답해 주었다. 상현어머니와 상현이 자가용 쪽으로 걸었고 석진이 뒤를 따라갔다. 병수는 나란히 걷는 상현어머니와 상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경로당이 있는 아랫마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종만과 아내가 저울을 바라보며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종만은 일곱 근 반이라고 했고 아내는 여덟 근이라고 했다.

“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거나 갖다 놔.”

병수가 아내를 향해 소리쳤지만 아내는 저울을 끝까지 지킬 태세였다. 병수는 입을 다물고 비닐을 걷어 한쪽으로 치웠다. 사람들은 고기를 한 덩이씩 들고 사라졌고 텅 빈 돼지우리와 핏자국들만 남아 있었다. 병수는 돼지 등뼈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궁이에서 새어 나온 장작불 열기가 얼굴을 쳤다. 병수는 등뼈를 아궁이에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길이가 길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병수는 부엌칼로 등뼈를 반으로 잘랐다. 먼저 꼬리 부분 쪽을 아궁이에 넣고 부지깽이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궁이 속의 불꽃이 반으로 줄어들면서 자신의 등뼈가 타는 듯한 통증이 흘렀다. 병수는 몸을 일으켜 돼지 등뼈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등뼈를 툭툭 쳤다. 그사이 아궁이 속의 불꽃이 되살아나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몸을 휘감았다. 병수는 멍하니 서있다, 등뼈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수돗가에서 그릇을 닦고 있었다.

“선반 위에 있는 등뼈 좀 삶아놔.”

“워디 간댜?”

병수는 대답하지 않고 아랫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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