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을 반복해 들어도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랩과 하드코어, “재미있잖아”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기획 코미디 영화, 자막을 따라 읽을 수조차 없이 휘황하게 돌아가는 TV쇼.아마 올해 대중 문화는 이런 것들과 조금 다른 새로운 양식을 선보일 것이다. 감각으로 대표되는 90년대 말의 정서가 2002년에는 뚜렷한 변화를 보일 전망이다. 감각적 시대에서 감동의 시대로.
▼시간 거슬러 사람을 만나는 한국영화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제작자 심재명씨는 “조폭과 유머, 액션을 소재로 한 상업영화의 추세는 내년에도 이어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올해와는 분명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일단 주류의 굵직한 감독들이 새로 보일 작품 대부분이 인간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단 시대극이 많아진다.
내년 칸 영화제 진출을 목표로 촬영 중인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19세기 말 천재 화가 장승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
천재로 불리는 화가의 이면에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땀과 눈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오로지 그의 천재성만을 선택해서 보았을 것”이라는 감독의 설명은 이 영화가 한 천재의 이면을 들추는 작업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떻게 ‘천재성’에 다가설 수 있었는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짐작케 한다.
지난 해 ‘친구’로 관객 동원 1위를 기록한 곽경택 감독. 그는 시선을 비운의 복서 김득구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감성의 영화를 원하는 곽 감독은 ‘비운=김득구’라는 공식을 과감히 버리고,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 ‘챔피언’ 속에 김득구라는 인물을 배치할 생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배를 곯아가면서 링에 섰던 김득구에 대한 관객의 시선을 유도할수 있기에. 그러나 진짜 곽 감독의 노림수는 ‘진한 감동’이다.
만일 8ㆍ15 특사인 정치범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감독이 어울릴까.
적어도‘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과는 인연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바로 ‘8ㆍ15 특사’는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하고 제작과 감독을 겸하는 그의 새 작품으로, 정치범을 다룬 비교적 묵직한 시대물이 될 것이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용기 있는 시도도 있다.
송강호 주연의 ‘YMCA 야구단(감독 김현석)’은 을사조역이 체결된 해인 1905년 결성된 우리나라최초의 야구단의 이야기이다.
식민지 국민의 울분을 따뜻한 코미디로 풀어가는 ‘휴먼 스토리’이다.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의 두 주역, 설경구와 문소리를 캐스팅해 6월 개봉을 목표로 촬영에 들어간 ‘오아시스’ 역시 희생자와 가해자,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로 사랑문제에 집중한 멜로 영화이다.
▼어,요즘 가요에는 노랫말이 들리네
댄스 가수들이 로맨틱한 발라드를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쿨의 ‘아로하’, S#arp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클릭B의 ‘너에게’는 모두 로맨틱한 R&B 스타일의 발라드.
추운계절을 틈 탄 댄스 가수의 일시적인 변신은 아니다. 음반 관계자들은 “지난 해 시장의 흐름으로 보아 올해는 감성과 감동이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예측에 따른 움직임”이라고 분석했다.
시장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줄곧 펑키스타일 댄스를 하던 S#arp은 애잔한 느낌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으로 변신한 후 정규 앨범이 아닌데도 25만 장을 팔았다.
감성을 대변하는 장르는 무엇보다도 R&B다.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짙은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다.
대영AV, 신촌뮤직, JYP 등 대형 기획사에서만 올해 새로 얼굴을 비칠 R&B 가수만 해도 6, 7명에 달한다.
이 같은 변화는 지난 해 신인으로서 판매량 60만 장을 넘긴 R&B 듀오 브라운 아이즈의 영향이 크다.
▼TV를 보고 있으면 왜 코끝이 찡할까
‘태조 왕건’ ‘여인천하’등 사극의 기세에 밀려 한동안 설 자리를 잃었던 멜로 드라마가 드디어 기지개를 펼 것이다.
그 첫 신호탄이 1월 14일부터 방송될 드라마 ‘겨울연가’(KBS)이다. “아픈 결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윤석호 PD는 애잔한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 드라마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남매의 사랑으로 숱한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가을동화’를 연출한 윤 PD가 펼칠 드라마는 첫사랑의 추억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망설이는 남녀의 이야기로 다분히 멜로적 감성이 깔려있다.
배용준과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유지해 온 최지우도 이 같은 분위기를 더욱 짙게 할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이런 분위기는 이미지난 해부터 감지됐다. ‘피아노(SBSㆍ오종록 연출)’가 선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코믹한 요소와 폭력성을 양념으로 가미했지만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본질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억관(조재현)이 과장스럽지만 묘하게도 짙은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정적인 흑백 스틸 사진으로 화려한 동영상을 대체한 휴먼 다큐멘터리 ‘포토에세이 사람’(MBC)은 이미 두 달째 시골에서 무명을 짜며 살아가는 할머니, 지리산 구례장터에서 60년간 엿을 만들어 팔아 온 할머니 등 보통 사람들의 훈훈한 일상을 조용하게 그려낸다.
낡은 듯한 흑백사진이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감동도 깊다. 파스텔톤색채의 애니메이션에 향수를 담아내는 ‘TV동화 아름다운 세상’도 5분짜리 짤막한 프로그램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아직은 ‘감동 프로그램’의 반향이 크지는 않다.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으로서는 ‘감동’의 트렌드가 완전히 자리 잡은 후에나 본격적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것이다.
▼왜 이제 '감동'일까
트렌드를 주도하는 경향이 강한영화가 ‘감동’을 화두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감각 효용 체감의 법칙’이다. 이미 너무나 많은 새로운 감각과 캐릭터, 상황을 보아 온 관객에게 가장 새로운 것은“이제는 사람 얘기”라는 것이다.
물론 ‘조폭마누라2’ ‘울랄라 시스터스’처럼 가벼운 웃음의 영화들 역시 촬영 중이다.
이미 상업영화 시장에서 공고한 ‘지분’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권택 곽경택 이창동등 일련의 스타급 감독들이 잇달아 신작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지형도가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수 년 간 유행한 ‘복고’의 효용이 다 떨어지자 보다 ‘근원’으로 눈을 돌리려는 시도도 세기 초의 새로운 상황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가요계가 방향 선회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TV 노출=음반 판매’라는 등식이 이미 깨졌기 때문이다.
기획성 가수들이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을 점거해도 음반 판매가 마케팅 비용도 감당 못하는 ‘처절한’ 결과를 맛보았던 제작자들은 제작비는 덜 들지만, 호소력이 강한 발라드 계열의 음악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물론 월드컵으로 분위기가 들뜰 올해, ‘감동의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시장 장악력을 가질 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또 하나의 트렌드로 2002년은 ‘감성과 감동’이 선택됐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문향란기자 iami@hk.co.kr 양은경기자 key@hk.co.kr
■감동의 '키 포인트'
‘감동’은 캐치프레이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2002년 감동 상품의 공식은?
과거의 휴먼드라마나 발라드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우리나라 R&B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And Fire), 쿨 앤 더 갱(Cool And The Gang)의 노래처럼 정밀하게 리듬을 타지 못한다. 엄격히 말해 웨스트라이프(Westlife)류의 발라드”라고 말한다.
‘슬픈 영혼’을 부른 유리의 소속사인 이클립스 뮤직 임기태 대표는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쉽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디가 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시 감성을 건드리는 것은 추억을 끌어올리는 가사다.
2집의 부진을 완전히 씻어낸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는 ‘여전히 난 부족하지만 받아주겠냐고…’는 노랫말이 잔잔히 파고든다.
영화의 문법 역시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다. ‘챔피언’의 경우도 김득구의 우울한 삶보다는 그의 진한 러브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에 더 많은 비중을 둘 예정이다.
‘YMCA 야구단’의 시나리오 역시 시대의 암울함은 간접 화법으로, 20대 초반 혈기왕성한 선수들의 천진함과 발랄함은 코믹이라는 직접 화법으로 전달한다.
분단문제를 세련된 어법으로 이야기했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향력이 큰대목이다.
노래는 더욱 현실성 있는 가사로, 휴먼 드라마는 코믹이나 액션 등의 ‘당의정’을 입혀 21세기형 감동을 만들어 낼 예정이다.
이미 감각 시대의 물량 공세를 충분히 받은 관객을 향해 돌진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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