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이 공동우승하면 안되나요?"“아저씨,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결승에서 만나면 어느 나라가 우승할까요?”“두 나라가 함께 준비한 대회니까 공동우승하면 안되나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어린이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16강’생각에만 빠져 있던 기자는 잠시 당혹스러워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마음을 추스려 아이들에게 물었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월드컵 16강에 올라갈까?” 아이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우리 팀이 최고니까 우승한다니까요.”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는 월드컵의 해를 맞는 두 나라 어린이들의 기대는 잔뜩 부풀어 있었다. 구랍 24일 한국의 차범근 축구교실과 서울일본인학교의 학생 65명이 한국일보 주선으로 월드컵 개막전이 열리는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함께 방문,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두 나라 학생들은 첫 만남이 서먹했지만 스스로 그려 만든 명함을 서로 나눠가진 뒤 이내 ‘월드컵 친구’가 됐다. 이천수 선수를 가장 좋아한다는 안바이 게이코(安倍 慶子ㆍ14)양은 “한국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젠 한국팀을 더 좋아하게 됐다”며 “한국 학생들과의 교류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바이 양이 한국친구에게 건넨 명함에는 ‘한국대표팀 파이팅!’이라는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었다. “일본 친구들을 알게 돼 너무 기쁘다”는 임주형(9ㆍ신길초등2)군 역시 “계속 연락을 주고 받으며 함께 공을 차고 싶다”고 좋아했다.
경기장을 함께 둘러본 두 나라 어린이들은 아시아 최대의 축구전용구장의 웅장함에 놀라며 “그라운드와 관중석의 거리가 정말 가깝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기자를 여전히 당혹스럽게 했다. 공을 준비해 온 아이들은 갑작스레 “우리들도 여기에서 공을 차게 해달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미래를 책임 질 아이들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꿈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꿈은 끝이 없지만 사실 한일 월드컵에 거는 기대는 소박하다. 월드컵을 계기로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학생들의 기대는 더욱 크다.
하타 시오리(八田 しおりㆍ14)양은 “지금까지 한국학생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월드컵이 열리는 올 해는 한국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고 싶다”고 소망했다. 집이 멀어 주위에 일본친구들이 없다는 혼마 야스나가(本間 泰永ㆍ13)군은 최근 한국친구들과 공을 차다 오른손에 깁스를 했지만 “방학에도 한국친구들과 축구를 계속하기로 했다”며 뿌듯해 했다.
강남구 개포동의 서울일본인학교는 올해 개교 30주년을 맞는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모두 합친 전교생이 400여명. 한국과 일본의 경계를 오가는 이 학교 학생들은 월드컵 공동개최의 분위기를 가장 생생하게 느낀다. 지도교사인 우에무라 아키히로(植村 昭博ㆍ39)씨는 “방학 전부터 수업 때면 월드컵 본선에 오른 출전팀, 선수들에 대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일본인학교는 한일월드컵을 새해 내내 수업의 최고 주제로 삼을 계획이다. 한일월드컵은 과거 두 나라의 어두웠던 관계를 청산하고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아이들에게 진정한 이웃의 의미를 일깨워 줄,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엔 한국학생들과 어울릴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오오츠 시몬(大津志門ㆍ14) 군은 “월드컵을 계기로 양국의 역사문제도 나아질 것”이라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또 사사키 노리코(佐佐木 典子ㆍ51) 학교 국제교류담당관은 “두 나라 학생들이 서로 더불어 사는 마음을 기르는데 이번 월드컵이 큰 계기가 될 것”이라며 “한일월드컵이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나미 데 미츠루(南出 滿ㆍ55) 교장 역시 “항상 조회 때면 모든 학생과 월드컵 이후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월드컵 기간 중 한국학교와 일본학교를 비롯, 프랑스, 브라질, 독일 등 한국의 여러 외국인학교와 함께 ‘국제 미니축구대회’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견학을 마친 두 나라 어린이들은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결승에서 맞붙기를 기대하는 아이들의 생각은 아무래도 터무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 어린이들의 씩씩한 모습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공동우승’도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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